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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1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4 ✦
“베드로의 부인과 통곡”
(마가복음 14장 66~72절)
[ 들어가는 말 – 각자의 결정으로 되는 것이다 ]
이번 <말씀의 삶> 공부를 통해 저 자신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말씀을 같이 읽을 뿐 아니라 배경적인 여러 이야기를 함께 읽고 강의도 하면서 저 자신이 가장 많이 배운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말씀의 삶>을 하면서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를 읽었고, 지난 가을부터 1년 정도 수요예배 때 여러 왕들을 통해서 영적 리더십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던 것이 있는데, 여러 왕들이 있는 중에 남 유다에는 가끔 성군이라고 하는 훌륭한 왕들이 있을 때, 어떻게 그렇게 악한 아버지 밑에 그렇게 훌륭한 아들이 나왔고, 반대로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어떻게 저렇게 악한 아들이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악한 왕 아하스였고, 그의 아들은 너무나 악한 므낫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이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해서 남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히스기야는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을 가끔 봅니다. 부모는 참 훌륭한데 어떻게 저런 부모 밑에서 저런 자녀가 나왔을까 할 때도 있고, 반대로 부모는 참 형편없는데 그런 부모 밑에서 어떻게 저런 훌륭한 자녀들이 나왔을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느끼는 것은, 부모 때문에 그 자녀가 어떻게 되고 하는 게 아니라, 부모의 영향은 있어도 결국은 자기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자신이 기도하고 기대하는 대로 자라기를 원합니다. 특히 믿음의 부모라면 자녀가 믿음으로 잘 자라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녀가 믿음의 길을 벗어날 때 ‘내가 뭘 잘못해서 내 자녀가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자책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릴수록 부모의 영향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상식으로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이 전적으로 부모의 책임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성경에도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를 벌하면 안 된다고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각자의 결정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완전히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독립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 할아버지’이고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각자가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 처음 살았던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어떤 학생들이 자기도 그때 거기서 살았으면 하나님을 잘 믿었을 것이라고 한 것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없던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타락을 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부모와 같은 존재는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기르셨는데 그들은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인가?
또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양육하셨습니다. 특히 열두 명을 부르셔서 양육하셨는데, 그들은 다 도망갔고,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 버렸고, 또 베드로 같은 사람은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훈련에 실패하신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나도 예수님처럼 실패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하는데, 그것은 합리화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하고 가르쳐도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도 실패하셨으니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제자들의 실패가 정말 예수님의 책임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이 각자의 책임이라고 가르칩니다.
아주 좋은 교회를 다니면 좋은 크리스천이 되는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최악의 교회를 다니면 최악의 크리스천이 되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환경이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결정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환경에 따라간다고 한다면, 좋은 환경에는 다 좋은 사람이 나와야 하고 나쁜 환경에는 다 나쁜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각자의 결정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타락과 유다의 반역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자기 책임입니다.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잘못된 길로 나갔다는 겁니다. 부모의 영향이 가정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부모는 가정에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결국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결정하고 나가는 것이지, 부모 탓을 할 수 없습니다.
제 친척 중에도 “우리 어머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계속 말하는 분이 있었는데, 아주 비열한 변명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자기 인생이 잘못된 것이지, 어머니 탓이 아닙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서 자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와, 또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믿음의 자녀를 두지 못한 분들은, 너무 죄책감을 갖거나 자책하지 마시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오늘 함께 깨닫기 원합니다.
1. 베드로의 실패 원인
1) 비교의식으로 인한 실패
예수님은 완벽한 스승이십니다. 완벽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완벽한 하나님이시며 완벽한 인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 밑에 있던 베드로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그 전에 큰소리치던 장면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29-31절)
여기서 예수님은 먼저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가장 먼저 나서던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냥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정도로 했으면 되는데, “다 버릴지라도”, 즉 “다른 사람은 다 실패하더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는 비교의식이 문제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가 될 것이냐, 누가 크냐 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인데, 그래서 베드로는 먼저 치고 들어가면서 “다른 사람은 다 버려도 나는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저 야고보나 요한은 주님을 버려도, 내 동생 안드레가 주님을 버려도, 저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세 번을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보시고, 그가 세 번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때 “내 양을 먹이라(치라)”라고 하시며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도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참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요한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데도 “저 사람은요?”라고 끝까지 자기와 비교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비교의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 참 부럽네’ 하고,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으면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형편이 낫구나’ 하는 정도로 비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비교하는 지나친 비교의식은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지금 내가 최고의 자리에 있어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곧 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나를 비교한다면 항상 비참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오는데, 열등감과 우월감입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두 가지로 표현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숨기기 위해 괜히 더 잘난 척하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저 사람들은 다 버려도 저는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말한 것은, 결국 그런 열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덮어 버리기 위한 허세를 부렸습니다.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있으면 허세를 부리게 됩니다.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데 아닌 척, 아닌데 그런 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비교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비교의식과 반대되는 것이 창조의식, 창조적 생각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부정적인 것이 비교의식입니다. 형제가 둘, 셋 있으면 “너는 왜 네 형(누나, 언니, 오빠)보다 못하니?”라고 할 때 상처가 됩니다. 또 옆집 아이보다 왜 못하느냐고 비교하게 되면 상처를 받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구나’ 하고 서운함을 느끼고 상처가 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그러다 보면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자기도 자꾸 비교하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독특하게 만드셨다는 의식입니다. 요즘은 지문 인식이나 음성 인식이나 홍채 인식으로 열리는 스마트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이 70억 이상이고 지금까지 산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한 명도 똑같지 않게 만드실까?
쌍둥이라도 지문이 다르고 음성도 다르고 생긴 것도 사실 조금 다릅니다. 그렇게 다르게 만드신 목적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저 사람을 따라하려고 합니까?
이다음에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뭘 물어보시겠습니까? “너는 왜 저 사람과 똑같이 못하고 왔니” 하시겠습니까? 저 보고 “너는 저 목사처럼 메가처치를 못 이루고 왔니” 하고 물어보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너는 왜 저 재벌처럼 돈도 못 벌고 왔니”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보실 겁니다.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사명을 왜 다 못하고 왔니?”
그렇다면 나에게 주신 이 독특한 사명, 지금 이 시대에 여기에 나를 두신 그 목적을 나는 이루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신경 쓰며 살다보면 남들과 자꾸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어에도 ‘Be yourself!’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이 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모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그대로 되어서 그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꾸 비교하다가 실패했습니다.
2) 소극적인 따름으로 인한 실패
또 다른 실패의 원인은 베드로가 소극적으로 주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따랐었지만, 결정적일 때는 소극적으로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입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소극적인 자리로 후퇴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의 실패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직전 상황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4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습이 실제로 거리가 멀었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마음으로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중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주로 뒷자리에 앉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최대한 멀리 앉으려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자리 다툼이 치열한(?) 곳이 바로 가장 뒷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앉으십니까? 앞에 앉으시면 안 됩니까? 학교에서 수업 때 학생이 가장 앞에서 열심히 듣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지, 최대한 멀리 구석에서 선생님에게 안 보이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최대한 멀리서 하려고 하지 마시고 가까이 오십시오. 실제 자리도 가끔씩 바꿔보는 것도 좋습니다. 오래 교회에 다니면 고정석이 있는데,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모르고 앉았다가 야단맞고 쫓겨나는 일도 있습니다. 모처럼 안 믿는 VIP가 처음 교회에 나왔다가 그렇게 야단맞고 쫓겨나니까 그 다음부터 교회를 안 나오게 되었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좀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꾸 멀리서 하려고 하면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가 안 따라간 게 아닙니다. 따라갔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안정거리를 유지하면서 멀리서 따라갔습니다.
“적당히 믿어라. 너무 푹 빠지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적당히 믿는 것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위험에 빠지고 실패하기를 원하신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믿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왕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그렇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충 합니까? 이왕 하는 건데 완전히 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온전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게 좋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68-71절)
제가 갖고 있는 성경 중에 이 부분을 나누어 소제목을 붙여 놓은 성경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처음 나온 분이 세례를 받으면서 성경을 선물로 받았는데, 제 성경과 같은 성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니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결혼했나요?” “왜요?”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던데요?” 그래서 성경을 보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 처음 교회를 나온 분이라 잘 모르니까 그렇게 부인이 세 명인 줄로 오해한 것인데, 얼마나 애교스러운(?) 질문입니까. 사실 교회에는 그렇게 처음 나오고 믿겠다는 분들이 많아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부가 아주 행복하고 화목하게 잘사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어느 날 이혼을 했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신앙에서 떠나 버렸지?” “아니, 그렇게 화목하던 부부가 왜 갑자기 이혼을 했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알아보면 갑자기 그런 게 아닙니다. 서서히, 서서히 균열이 생기다가 터져서 무너진 겁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였지만, 속으로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그렇게 된 것이지, 잘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이 이겁니다. 베드로도 잘 따르다가 어느 순간부터 멀리서 따르게 된 겁니다. 서서히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에게 서서히 멀어지는 조짐은 없는가를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내 자녀가 주님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징조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한두 번 빠지다 보니까 그게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멀리서’ 주님을 따라가는 조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 중에 자녀가 주님과 멀어지도록 만드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한국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생쯤 되면 교회의 직분자들이 자녀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본인들은 열심히 예배드리고 설교 듣고 성경공부도 하고 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의 결정을 합니다. 특히 자녀에 대해 그렇습니다.
성탄절 같은 때 어린이들이 나와서 발표를 하면 다들 좋아하고 기뻐하며 격려합니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가 되어 대학 입시를 앞두었는데 나와서 열심히 하면 걱정하고 긴장을 합니다. “야, 적당히 해. 너무 푹 빠지면 안 돼.”라고 주의를 줍니다. 그러면 아이가 점점 멀어지는데,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부모들이 ‘대학 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열심히 하지 않던 자녀가 대학에 가서 갑자기 열심히 할 확률은 낮습니다.
한국에서 ‘한미준’이라고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수년 전에 그 단체가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신앙의식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76%가 29세가 되기 전에 시작했다고 답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약 60% 되는 사람들이 10-19세 사이에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청소년 시절을 지나며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청소년 때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수련회도 보내는 겁니다. 여기서는 일주일에 한 번 모이지만, 수련회에서는 민감한 나이 때에 집중적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공부하기 때문에 효과가 좋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자녀를 두신 분들은 보내도 좋고 안 보내고 좋은 게 아니라, 자녀의 신앙을 위해서는 자녀가 가기 싫어해도 보내야 합니다. 참석하는 것뿐 아니라 주님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주님을 못 만나니까 오락가락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부모님들이 거기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야, 대충 해. 나중에 해도 돼.”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면 이미 그 열정과 순수함이 사라지고, 거센 세속적 가치관의 물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미 중고등학교를 통해 말씀으로 다져지고 나가도 힘든데, 말씀이 속에 없는 상태에서 대학교의 세속적 물결에 부딪치다 보면 휩쓸려 가버리지, 승리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물론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하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둘 다 하지는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 아이가 기도를 안 하고 성경을 제대로 안 읽는다고 화내는 부모님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하면 “너 뭐 해? 내일이 시험인데 왜 공부 안 해?”라고 화내지만, “내일이 주일인데 왜 밤이 늦도록 안 자니? 왜 말씀을 안 읽니?”라고 야단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중요합니까? 이 세상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100년 살고 끝나는 이 세상에 집중하겠습니까? 여기서 잘 살아야 그 후의 영원한 삶에서 성공합니다. 혹시 이 땅에서 공부가 조금 뒤떨어져 대학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또 대학 때 조금 어려워서 직장이 썩 좋지 않다 해도,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자녀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땅에서 성공하고 누구나 인정해주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는데,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영원한 멸망, 저 끔찍한 지옥의 고통에 빠졌다면 그것이 성공이겠습니까? 우리는 영원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자녀들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버리면 신앙을 만회한다는 게 굉장히 힘듭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잘된 사람도 있지만, 통계적으로 아주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어릴 때부터 자녀들을 믿음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잘 양육해야겠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의 격려가 아주 중요합니다.
2. 베드로의 회복
1) 주님의 말씀
베드로는 나중에 돌아왔습니다. 결국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회복될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72절)
바로 이 말씀 때문에 베드로가 살아났습니다. 베드로가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는데, 여기서 울었습니다. 그냥 눈물을 조금 흘린 게 아니라, 완전히 무너지면서 통곡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가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그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을 들려주는 겁니다. 어릴 때부터 말씀을 많이 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 때는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해도 많이 접하게 해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수록 그 의미를 생각하고 적용하게 이끌어줘야 되겠습니다. 유태인들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탈무드나 구약성경을 계속 읽어줍니다. 안 듣는 것 같아도 그것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게 필요합니다. 이미 아이들이 다 컸다면, 스스로 말씀을 읽도록 체크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목장식으로 감사한 제목을 나누는 겁니다. 꼭 가정예배라고 하지 않아도 Family Time을 가지면서 서로 감사의 제목을 나누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겁니다.
어느 순간인가 자녀가 신앙의 회의를 가지고 머뭇거릴 때도 있고 멀리 갈 때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런데 부모에게서 전수된 신앙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의심과 회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겪을 때 더 단단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녀 안에 말씀이 있으면, 조금 멀리 갈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 말씀 때문에 돌아오고 말씀 때문에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집어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마음속에 말씀이 있게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져서 결정적인 순간에 그 말씀이 기억난다면 자녀 교육에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녀들을 지켜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아무리 내 자녀를 사랑해도 24시간 붙어 다니면서 내 자녀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학교만 가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바로 지난주에 Ohio State 대학교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칼을 휘둘러서 몇 명이 다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될 줄 알고 우리가 다 지키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지켜줍니다.
2) 주님의 중보기도
누가복음 22장에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의 공격을 경계하라고 하시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회복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기억났고, 또 예수님이 미리 그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중보기도 덕분에 베드로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내 자녀이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내 말을 안 듣고 뭔가 상황이 어려울 때, 부모로서 한계를 느낍니다. 내 지혜로 더 이상 내 자녀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정말 그리스도를 따르는 부모는 그럴 때에도 자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축복 기도를 해주는 겁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대에서 중세가 될 때 이탈리아 밀라노(Milan)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도 아닌데 예배당 한 구석에서 어떤 여인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계속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로 통곡을 하는 겁니다. 5분, 10분, 20분, 30분 계속 우는 겁니다.
그때 그 교회의 감독이며 초대 교회의 유명한 교부 중 하나였던 암부로우스라는 분이 교회당 구석에서 계속 우는 부인에게 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부인,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감독님, 제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라고 하며 우는 겁니다. 게다가 그 아들은 사생아까지 낳은,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암브로우스 감독이 역사에 남을 만한 유명한 한마디 말을 해주었습니다.
“부인, 걱정 마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여인의 이름은 모니카였고, 그 여인의 아들의 이름은 어거스틴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그 유명한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가 바로 그렇게 방탕하던 사람이었고 이단에 빠졌던 사람이었는데, 그 어머니의 기도를 통해 돌아와서 세계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는 놀라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망하지 않는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내가 내 자녀를 위해, 자녀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정말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면 염려 마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의 자녀는 망하지 않습니다.
3) 주님의 사랑
같은 누가복음 22장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눅 22:61)
이것이 성화로 그려진 것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쪽에서 실패했고 예수님은 저쪽에서 끌려가시는데, 건물 사이로 눈이 마주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고통당하고 끌려가시는 순간에도 베드로를 돌아보고 계셨습니다. 지금 그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저주와 맹세까지 했지만,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눈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마음에 찔림이 오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면서,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통곡하고 회개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내 마음에 안 들 때조차 계속 봐주는 눈길이 필요합니다. 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 중에 잘하다가 갑자기 뒤로 물러가거나, 마음에 안 들게 하거나, 무슨 문제를 일으킬 때,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제쳐놓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그 불쌍히 여기시는 눈길을 가지고 계속 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 기도를 해주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과 기도가 한 영혼을 살립니다.
[나가는 말]
오늘 베드로는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만약에 예수님을 팔고 돈도 받았지만, 그때 “가서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나와 같이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 것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했다면, 그래서 회개했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이 기억났고 회개했고 그래서 결국 회복되어 놀라운 주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 이렇게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저 자신도 그렇고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고 다른 교회도 그렇고, 이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를 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잘하던 분들이 갑자기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거나, 관계에 어려움이 생겨서 힘들어 할 때, 정말 믿음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어떻게 결판이 나는가?
믿음의 사람도 넘어지고 상처 받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뭐가 다른가 하면, 결국은 말씀 때문에 금방 다시 돌아옵니다. 순간적으로는 넘어질 수 있는데, 결국 다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 저분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구나.’ 하고 압니다. 물론 그럴 때 같이 기도를 해드리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원인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마음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자기를 붙들어서, 지금 너무 마음이 힘들지만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나에게 들려주시니, 그 말씀을 붙들고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넘어질 때가 있을지라도, 바로 이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그래서 주님께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