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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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미국으로 이민 온지 정확하게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1986년 11월 13일, 당시 만 20세로 한국에서 대학교 2학년이던 저는, 가족(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South Carolina 주로 이민을 왔습니다.
한국의 김포공항을 떠나 로스엔젤레스 공항(LAX)으로 들어왔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입국 심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민국 직원이 뭐라고 하는데, 아주 천천히 반복해서 말했기 때문에 약간 알아듣기는 했지만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전혀 못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자 굉장히 답답해하면서 도장을 찍어주며 퉁명스럽게 저리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때라,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비행기 안에서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인지, 뭔가 설레고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후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일단 영어가 안 되니 너무 불편했고, 당시 중3이던 동생은 금방 9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저는 대학을 다니다 왔기 때문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시험도 봐야 했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편입이 결정될 때까지의 약 8개월 동안은 정말 지루하고 답답했습니다.
이민을 오기 전에는, 미국에 가서 몇 년 살기만 하면 영어가 저절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영어는 빨리 늘지 않았고, 한국어로 해도 어려운 철학 전공과목들을 영어로 공부하자니 정말 어려웠습니다. 한국에서는 강의 때 노트를 열심히 받아 적어서 시험 볼 때 그것만 외우면 되었는데, 미국에 오니까 데카르트, 흄, 칸트 등 유명한 철학자들의 책들을 직접 읽게 하니 참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잘하지 못했던 수학이나 화학이 더 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강의하는 내용들을 정확히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서, 수업이 끝나고 옆에 있던 학생에게 다음 번 과제가 이것이 맞느냐고 확인한 후에야 강의실을 떠나던 것도 기억납니다. 게다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미국을 잘 알지도 못하던 제가 첫 학기부터 하필 ‘미국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감사했던 것은, 제 옆에 앉는 남학생이 마침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다녀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볼 때마다 “I love Korean Soju!”를 외치며 한국 사람인 저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그나마 ‘소주’를 ‘주쏘’라고 잘못 발음했지만 말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느덧 30년이 흘렀습니다. 이민을 온 바로 다음 해인 1987년에 한국에서는 6월 항쟁이 벌어져 엄청난 군중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나라 전체에 난리(?)가 났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 운동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제 친구들도 대부분 다 거리로 나가 시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는 그 1987년 6월 이후 가장 많은 수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인 일이 바로 어제 또 일어났습니다. 이 미국에서도 지난 화요일 대통령 선거 이후 결과에 불복하는 사람들이 여러 도시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고, 그와는 반대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공공연히 유색인종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공격을 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과학기술의 발전을 비롯하여 세상에는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미움, 갈등, 살인, 불의, 탐욕, 부정 등과 같은 문제는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앞으로 30년 후를 바라보며 주님의 길로 더욱 힘차게 걸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