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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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8 ✦
“절망 속에 나타나는 믿음의 기적”
(마가복음 5장 35-43절)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밤에 자다가 악몽을 꾼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가끔 꿉니다. 오래 전에는 주로 이런 꿈을 꿨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니는데, 계속 수업을 빠지다가 갑자기 시험을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황당하게 수학 시험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황당한 꿈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어떤 꿈을 꾸는지 아십니까? 예배 때 설교를 할 시간이 되어서 강대상에 올라왔는데, 보니까 성경도 없고 설교 원고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 있나 찾는데 사무실에 있다고 하니까 빨리 가서 가져오려고 갑니다. 그런데 뭔가가 뒤에서 당기는 것처럼 잘 가지지 않습니다. 간신히 도착해서 보니까 사무실도 거기에 없습니다. 너무 황당해 하다가 깨보니 꿈이었고, 저는 구원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또 다른 악몽도 비슷합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 교인들이 모여 있는데, 이상하게 교인들 중에 아는 분은 없습니다. 이제 예배를 시작할 준비를 하는데, 남들은 다 양복을 입고 왔는데 저는 아직 평상복을 입은 채로 이 앞에 서 있습니다. 빨리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이상하게 집을 못 찾습니다. 간신히 집에 도착하여 들어가려고 뛰는데 뛰어지지도 않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예배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하니까 교인들이 기다리면서 열렬한 환영의 박수를 쳐줍니다. 그런 식으로 악몽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니 그나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것은 꿈이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사시면서 정말 피가 마르는 듯한 심정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꿈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때로 아주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꿈이라면 깨어나면 되지만, 실제 상황이면 잠을 자기도 힘들고 잠에서 깨어도 그대로입니다.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때에는 아주 절박한 심정이 되고 어떻게 할 줄 몰라 막막해집니다. 너무 어려우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예 멍하니 그냥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와 도움을 구하는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야이로입니다. 그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발견하기 원합니다.
1. 야이로의 간절한 요청
지금까지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많은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시다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질러 거라사 지역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그를 고쳐주셨고, 이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난주 본문인 21절을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 지역으로 돌아오시고 배에서 내리시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기다리다가 열렬히 환영합니다. 그 무리들 가운데 바로 야이로가 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회당의 행정 책임자로서, 회당을 잘 관리하도록 책임을 맡은 장로회의 의장쯤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야이로는 가버나움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부자이며 거기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예수에 대해서 들었을 때, 아마 그는 예수가 그저 어쩌다 인기를 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큰 능력으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가서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야이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딸이 아프게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42절에 보면, 야이로의 딸은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열두 살은 유대인들의 문화에 따르면, 아이가 여자가 되는 나이라고 합니다. 열두 살 때 유대 여자들은 정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나이입니다. 유대인 아이들은 만 열세 살이 될 때 성인식을 하는데, 작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성인식을 하느라 북 치고 장구 치며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 같은 나이의 여자아이들은 그룹으로 와서 춤을 추며 좋아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 나이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 아이는 야이로의 유일한 자녀였습니다(눅 8:42).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그의 딸이 열두 살이라는 것을 볼 때, 야이로도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30대 초중반에서 많아야 50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이로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가버나움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 동안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습니다. 모든 것이 좋았고 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 침상에서 죽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보고, 독립적이고, 그러면서도 아주 성공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그 동안 쌓아왔던 공든 탑이 우르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자기가 잘나서 성공한 줄 알았는데, 자기가 잘해서 모든 것이 잘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그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자기 자신의 실제 모습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는 그가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강할 때,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게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광야로 도망가서 초라한 목자로서 장인의 양들을 돌보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은 무기력한 존재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을 바로 그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광야에서 겸손하게 된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찾으며 돌아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힘든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께 다시 헌신을 다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면, 이것이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은 아닌지, 어떤 목적을 위해 이러시는 것은 아닌지, 내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 하면서 원망하거나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통해서, 아마도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 동안 부드럽게 말씀을 하시는데도 못 듣거나 아니면 일부러 안 들으니까, 하나님은 크게 소리를 질러서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움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야이로에게 큰 슬픔과 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많은 의사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의 딸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어도, 그가 자기 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가 야이로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뿐 아니라, 심지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도 살려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눅 7:11-17). “그분이라면 당신의 딸을 살릴 수 있을 겁니다.”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집도 없는 떠돌이 랍비이고, 게다가 그는 아무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나사렛 출신입니다. 또 자기와 같이 높은 사람이 그런 사람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라고 하며 주저했을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에게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상당히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가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안 계신 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언제 다시 이곳으로 오실지 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가서 찾아올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다면 그에게 가서 부탁을 해야 할 것인지, 정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예수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 야이로의 고민이 다시 시작됩니다. 자신의 지위와 자존심은 자기가 예수라는 가난한 랍비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토록 귀중한 외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볼 때, 그 사랑하는 딸이 핏기 없는 얼굴로, “아빠, 너무 아파요.” 하는 것을 들을 때, 드디어 그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다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야이로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길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렇게 프라이드(pride)가 강했던 야이로가, 그토록 고상하고 높은 지위의 야이로가 와서, 놀랍게도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습니다(22). 그리고 간절히 예수님께 죽어 가는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23). 야이로의 옷은 분명 비싸고 좋은 옷(요즘으로 하면 비싼 명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야이로는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이나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존심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나 자신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자존심도, 세상의 명예나 지위나 부귀도, 다른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주님께로 가는 것을 막도록 놔둬서는 안 됩니다. 그 어느 것들보다도 주님께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냥 있지 마십시오. 새벽기도 나오세요. 시간이 안 맞으면 집에서도 좋습니다. 울부짖는 기도를 하십시오. 금식하며 울부짖으십시오. 정말 매달려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외쳐야 합니다. 왜 못합니까? 그렇게 어렵고 힘든데 뭘 따집니까? 그냥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며 외쳐야 합니다. 주님은 들어주십니다.
2. 예수님의 사랑
야이로가 진실한 마음으로 같이 가주시기를 요청하자,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십니다(24). 예수님이 왜 가십니까? 야이로의 믿음이 대단해서 가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 가득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야이로의 믿음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것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기 집에 오셔서 손을 얹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23). 예수님은 직접 가서 자기 딸을 만질 필요가 없이, 먼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야이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십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함께 가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야이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인물인 그가 자신 앞에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 쉽지 않음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겸손한 마음과 사랑을 보시고 함께 가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강하고 빈틈없던 야이로의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이제 상한 마음이 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강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게 ‘믿습니다!’라고 기도해서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적의 원인이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는데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도와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는 외치고 울부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어려운데도 새벽기도나 금식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외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있습니까? 주님 외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상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이제 함께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시더니, 주변을 둘러보면서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31) 하고 물으시며 자신을 만진 사람을 찾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무리 중에서 한 여인이 나와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동안 시간이 지체가 됩니다.
야이로는 피가 마르고 혀가 바짝 타 들어가고 식은땀이 줄줄 흐릅니다. 1초가 급한 이때, 예수님은 저런 여자와 만나느라 금쪽같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는 말을 하고 계시는 바로 그때, 야이로의 집에서 종들이 옵니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5절)
이 순간 야이로는 어땠겠습니까? 앞이 노래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저 여인이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예수님이 그냥 자기와 함께 가주기만 했어도...’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으시며 확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6절)
예수님이 여기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하실 때 ‘믿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원어로 ‘계속성 동사’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상황이 끝났고 절망적인데도 주님은 “계속해서 믿어라.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믿는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딸이 구원을 얻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집을 향해 계속 갑니다. 만약 야이로가 자기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이 더 이상 같이 안 가도 된다고 하며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딸도 다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해도, 예수님을 따라 같이 갔습니다. 이것이 야이로의 믿음입니다.
우리 교회에 처음 운전해서 오실 때, 어떻게 오셨습니까? 모두 지도를 믿고 온 것입니다. 이전에는 종이 지도를 프린트해서 다녔는데 요즘은 대부분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으로 또는 GPS로 찾아서 다닙니다. 작년에 유럽과 한국에 갔을 때도 아주 유용하게 전화기의 지도 앱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처음 갈 때는 길을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갑니다. 그렇죠?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아는 경험과 지식으로 갑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면서 시내를 다녀보니까, 첫 날은 지도를 보면서 다녀야 했는데, 그 다음에는 이미 가본 곳이라서 그냥 다녀도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는 믿음으로 따라 갑니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 따라가면서 거기에 지식과 경험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다 알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 몰라도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믿고 따르다 보면 따라가면서 체험도 하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을 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8절)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장례가 나면 통곡해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가족들도 울고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을 데려다가 통곡하게 하고 있는 겁니다.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39절)
그러나 사람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0절)
사람들은 소녀가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사람들에게 그 소녀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곧 살려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위대한 선생이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1-42절)
예수님은 들어가서 “달리다굼” 하시며 소녀를 살리십니다. 그러자 아이의 부모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랍니다. 이들은 방금 전까지도 예수님을 비웃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직접 목격한 다음에는, 그들의 태도가 바뀝니다. 아무도 더 이상 비웃지 않고, 더 이상 아무런 조롱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가 살아나자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43절)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난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영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일단 먹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더 많은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식사를 잘 하고, 잠을 잘 자고, 화장실을 잘 가고, 운동도 하고, 그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영적인 생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큰 승리를 거둔 다음에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겠다.’라고 하니까 도망을 갔습니다. 탈진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만져주기까지 하시면서 먹을 것을 준비해서 먹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이 좋다고 해서, 연속적으로 예배하고, 또 예배하고, 또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체험했다고 바로 이어서 또 부흥회를 하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선교를 다녀와서 은혜가 충만하다고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자기 몸을 혹사시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육체와 영을 분리시켜 육체를 나쁜 것으로 보는 시각이 고대 헬라인들의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 육체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몸을 잘 돌보는 일도 영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로마서 12:1에서도 말씀합니다.
야이로와 그의 아내와 또 그의 딸은 죽는 날까지 예수님을 증거 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사건은 특히 당사자인 야이로의 딸의 평생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에 제가 아는 목사님의 사무실에 새 한 마리가 들어와서 그 작은 방을 날라 다녔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창문을 열어 새가 나갈 수 있게 도와줬지만 새가 그리로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마침내 벽에 부딪치고 창문 유리에 부딪치고 하던 새는 사무실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목사님이 새를 손으로 들어서 창밖으로 날아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 전에 잡아서 내보내주려 할 때는 막 도망가갔는데, 부딪쳐 힘이 빠져 떨어지고 나서야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겠다고 혈기왕성하게 움직일 때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일하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하기를 포기하고 엎드릴 때, 하나님은 일하기를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When I work, I work. But when I pray, God works.”
“내가 일하면 내가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의 능력 밖의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또 가능한 영역에서 나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반면 할 수 없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가 하겠다고 하면 교만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동시에 엄청난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이천 년 전에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던 그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