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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0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5 ✦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마가복음 4장 35-41절)
[들어가는 말]
어제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쉬고 있는데, TV에서 미국 프로 풋볼 플레이오프(NFL Playoff)를 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광고를 하는데 옛날에 유명했던 에밋 스미스(Emmit Smith)라는 선수가 나오기에 저는 반가워서 “야, 에밋 스미스다. 옛날에 너무 잘했다. 댈러스 카우보이(Dallas Cowboys)에서 우승도 몇 번 했다.”라고 하니까, 제 아들이 저 사람을 아느냐고 해서 안다고 했더니 자기는 전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요즘에 나오는 선수를 보고 저 선수가 어쩌고저쩌고 해서 나는 저 선수를 모른다고 하니까 저 선수도 모르냐고 했습니다.
저는 옛날 선수들을 알고 제 아들은 요즘 선수들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그 선수들은 저희를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나는 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모른다고 하면 진짜 아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바마 대통령을 나는 안다고 하지만, 문제는 그분이 나를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짜 안다고 하는 것과,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내가 지식적으로 아는 것뿐이지 그 사람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그 사람과의 관계가 있을 때 안다는 말을 씁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안다고 할 때 그 ‘안다’는 말을 씁니다. 경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들이 있습니다. 그 중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아주 어리석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번 꾸중을 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토록 어리석고 믿음도 부족했던 제자들을 통해 세계 복음화를 이루기 원하셨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에게 큰 소망도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땅 끝까지 복음 전하기를 원하셨는데,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확실히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큰 권능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려내는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기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겉모습만을 보고 놀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만 좇는 것이 아니라, 이런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짜 누구이신가를 알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세워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들을 가르치는 과정으로서, 강한 자연의 힘도 다스리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1. 저편으로 건너가는 목적 (35-36절)
여러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시던 예수님께서는, 저녁이 되어 해가 저물 때가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5-36절)
예수님은 왜 저편으로 건너가려고 하시는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 동안 너무 많은 사역을 함으로 피곤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병자들을 고치는 사역,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매일 하심으로 인해 아주 피곤하고 지치셨습니다. 38절에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피곤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이셨고 100% 인간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특히 이렇게 미국에서 남의 나라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직장 생활을 하는 분들은 정말 피가 마르는 경험을 합니다. 업무를 처리하랴, 다른 상사나 동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랴, 특히 소수민족으로서 열심히 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또 사업을 하는 분들은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육체적으로도 얼마나 피곤합니까? 경쟁도 있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습니까?
직장을 갖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주부들도 집안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할 일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은퇴한 분들도 왜 그렇게 할 일이 매일 많습니까. 목회 사역도 여러 가지 면에서 피곤하게 되기 쉽습니다. 일을 하려고 하면 교회 일도 끝이 없습니다. 목회자만 아니라, 교회에서 사역을 맡아 수고하는 분들은 잘 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이러한 많은 일들로 인해 피곤하고 지치셨습니까? 그러나 위로가 되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피곤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직접 사셨던 예수님은 우리 삶의 문제들을 다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수로서 일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역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피곤함을 이해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십니다. 사실 목수로 일하면서 사기 치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어떤 유혹들이 우리에게 다가 오는지도 아십니다. 사역을 하다가 힘든 것도 다 아십니다. 특히 열심히 섬기다가 배신을 당할 때의 아픔도 아십니다. 우리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시며 사랑으로 인도해주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저편으로 가자고 하신 이유는, 단지 배에서 잠자며 쉬려고 그러신 것만이 아닙니다. 또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엄청난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것을 바로 곁에서 보았습니다. 직접 자기 귀로 권능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은 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 복음화라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셨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자들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전할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즉 그분이 인류의 메시야이시며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로 나가면 곧 강한 폭풍이 오리라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분명히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호수로 나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여러 선지자들 중 하나가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주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이는 결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많은 귀신에 들린 한 불쌍한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바다 저편으로 가셨습니다(5장). 계속되는 사역으로 인해 지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강한 폭풍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귀신 들린 그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셨고, 그가 살던 이방 지역에도 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이 분이 바로 사랑의 우리 주님이십니다.
2. 예수님을 따르다 만난 큰 광풍 (37-38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실 때 아주 심각한 문제 하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갑자기 엄청난 폭풍이 불어와서 큰 물결이 배를 덮치게 된 것입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7절)
지난여름 갈릴리 호수에서 보트를 탔을 때는 물결도 잔잔하고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호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갑작스런 폭풍이 자주 일어납니다. 밤이나 이른 아침 물결이 잔잔해서 사람들이 안심할 만한 때에 갑자기 폭풍이 올 정도로, 일기의 변덕이 아주 심한 곳입니다.
북쪽은 높은 산지이고 갈릴리 호수는 낮기 때문에 거기서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날 때 강한 폭풍이 갑자기 발생합니다. 본문에는 광풍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도 “큰 광풍”이니까 그만큼 강한 바람과 물결이 일어나서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가라앉을 지도 모르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37).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몇 명은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전문직 어부(professional fishers)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녁인데도 저편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 위험한 폭풍이 올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기를 주저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가자고 하시니 따라 나오긴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심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배를 젓는 기술이 뛰어난 그들이었더라도, 커다란 파도와 강한 바람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급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8절)
놀랍게도 예수님은 아주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보십시오. 제자들이 이 폭풍을 만나게 된 것은, 예수님을 따라서 바다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땅에 그냥 있었더라면 이러한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다른 배들도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바다로 나왔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풍이라는,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 불순종해서 폭풍을 만난 게 아니라, 순종해서 따랐다가 폭풍을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고 해서, 삶이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라갈 때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970-8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인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그 주된 메시지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복이 어떤 복인지에 대해서는 잘못 가르친 적이 많습니다. 그 복은 물질적인 복만이 아닌데 그것만을 얘기한다면 반쪽 진리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또 가르쳐주는 것은,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오히려 진정한 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도행전에서의 스데반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왔습니다. 죽임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박해는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20세기 100년 동안 그 전 열아홉 세기(1900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미국에서도 수년 전 콜로라도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한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고 믿는다고 했을 때 총을 쏴서 죽였습니다. 요즘에도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계에서 매년 15만 명 이상 살해당하고 있고, 그 외에도 수백만 명이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혼자 교회에 다니는 분은 다른 가족들에게서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가서 시간을 많이 보내느냐, 돈은 왜 갖다 바치느냐, 가족끼리 놀러가야 되는데 왜 매주 가느냐 등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친구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또 믿는 자로서 신앙 양심대로 사업을 하다 보니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려움과 위험과 핍박을 만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주님을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텐데, 남들처럼 그냥 살면 될 텐데,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골치가 아프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아무 문제가 없이 편안하도록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폭풍 한 가운데로 일부러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바로 거기에서 주님은 우리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우기 원하십니다.
폭풍 속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이 상황을 다스림을 믿어라. 내가 너를 책임진다. 나만 따르라.”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남태평양을 여행할 때 갑자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지나가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갈수록 배는 무섭게 흔들리고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참다못해 갑판으로 올라가서 선장을 찾아 갔습니다. 선장에게 상황을 물어보려고 갔더니 선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공포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선장의 얼굴은 너무나 평안했고 미소까지 띄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객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선장의 얼굴을 보았는데,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전혀 염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바다에 풍랑은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뱃전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르고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은 엄청난 폭풍이 불어와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폭풍이 없기 때문에 신뢰하며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폭풍 가운데에서 오히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광풍은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3.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39-41절)
제자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39절)
“잠잠하라 고요하라(Quiet! Be still!)” 딱 두 마디 밖에 안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간 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의 인생을 마구 흔들어 놓는 폭풍과 풍랑 가운데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딱 한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처리하시는, 능력의 주님이 필요한 것이지, 어떤 다른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앙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어떤 어려움이 일어나면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나름대로 애를 써봅니다. 주님을 먼저 의지하면서 그렇게 노력하면 괜찮지만, 주님은 제쳐놓고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바로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모시느냐 모시지 못하느냐에 따라 인생 항로가 결정됩니다. 태평양과 같은 큰 바다를 건널 때 선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알면 다른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폭풍이 언제 불어올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몰라도 됩니다. 선장을 신뢰하면 됩니다.
인생의 신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그 모든 해답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의 일들에 대해 ‘왜(Why)?’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누구(Who)?’라고 묻는 것니다. 누가 이 상황을 붙들고 계시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점점 더 암담한 처지에 빠지게 되고, 나중에는 되는대로 되라 하는 자포자기식이 되고 맙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0절)
이 말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로부터 믿음을 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목격했고 권능의 말씀을 계속 들어온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바로 인류의 구주이심을 깨달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기적을 목격했고, 그토록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깨닫는데 실패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제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문제는 단지 폭풍 때문에 무서워했다는 점이 아닙니다. 그런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엄청난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두려움 자체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두려워하게 된 원인, 즉 왜 두려워하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토록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신 능력의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예수님이 누군 신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분을 신뢰하지 못했고, 그래서 두려워하게 된 것이 그들의 진짜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41절)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40절에서 지적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무서워하는 이유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 벌벌 떨면서 소망 없는 자처럼 두려워하고 걱정하게 된다면, 그 근본 원인은 폭풍이 강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또 그 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힘써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내게 누구십니까? 능력의 주님이심을 믿는다고 하지만, 막상 나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다 해결하셔도 내 문제는 주님도 해결하지 못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연애하는 두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혀 만남도 없고 전화도 안 하면서 서로를 알아 가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함께 만나 대화하고 알아가는 시간이 없으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만 고집하게 됩니다. 대화가 없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일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가능한 한 자주 모여서 서로를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하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지만, 막상 오랜만에 만나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서로의 공통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만날 때 할 이야기도 더 많습니다. 그리고 매주 만나 교제할 때 더 관계가 깊어집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도 딴 방법이 없습니다. 매일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길뿐입니다. 주님과 만나서 사귀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또 주님께 기도하며 전심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것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삶 공부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내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주님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교제를 하면, 능력의 주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죽으셨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소망 없는 사람처럼 두려워 떨지 않게 되고, 오히려 평안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축복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일이 일어나기 약 600년 전쯤, 멀리 바벨론(지금의 이라크) 땅에서 놀라운 사건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세 명의 청년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만든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부한 사건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그들은 죽을 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들어라. 너희가 참으로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이라도 너희가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내가 만든 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할 마음이 되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아뢰었다.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 일을 두고서는, 우리가 임금님께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 살펴 주십시오.’” (다니엘 3:14-18, 새)
이 얼마나 담대한 믿음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믿음이며, 오늘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세 명의 믿음의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확실히 신뢰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급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즉 혹시 불 속에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타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능력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음을 신뢰했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하나님을 섬길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에도 활활 타는 무서운 풀무 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엄청난 폭풍이 불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보며,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라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합니다. 괜히 예수를 따라가다가 큰 폭풍을 만났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안전하게 있지 괜히 유난을 떨다가 저런 어려움을 당하네.’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믿음이 자랄 수 있게 됨을 믿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혹시 폭풍 속에 휘말려 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처참한 죽임을 당한 그 모든 순교자들이 다 실패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실패했습니까? 죽는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와 같이, 만일 극심한 어려움이 닥쳤을 지라도 함께 계신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는 믿음, 혹시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따르는 믿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되어야 하지만, 혹시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혹시 내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가겠노라는 믿음,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