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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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11 ✦
“적대자인가, 가족인가”
(마가복음 3장 20-35절)
[들어가는 말]
요즘 테러 공격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습니다. 이제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아프리카처럼 소위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지역뿐 아니라,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들도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안전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미국에서도 계속적으로 총기 사고가 일어나, 지난주에도 또 여러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물론 미국에서는 지난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도 있었습니다. 사실 테러 공격으로 죽는 사람보다 미국에서 총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을 찾습니다. 지난 9.11 테러 공격 때도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렇게 가족을 찾게 됩니다. 만약 내 가족이 그런 사건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가족을 걱정하면서 찾아 나서게 됩니다. 가족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1. 예수님의 대적자들 (20-27절)
갈릴리에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매일 바쁘게 지내셨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0절)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굉장히 바쁘게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활동들 때문에, 특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굉장히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 감시하면서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잘 지켜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 전해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에 대해 염려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고, 형제자매들은 자기들의 형이나 오빠를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당시에는 잘못된 교리나 이단적인 내용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귀신에 들렸다고 몰아서 백성들을 현혹한 죄에 대해 율법이 내리는 벌은 사형이라고 하며 죽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족들은 그런 위험이 닥치기 전에 빨리 붙들어 오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1)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 누구입니까? “예수의 친족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후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생활을 통해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들을 보며 이 사람이 정말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우리 예수가, 우리 형이, 오빠가, 조카가, 뭔가 대단히 잘못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붙들러 왔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들이 아는 자기들의 가족 예수인 줄만 알고 잡으러 온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미쳤다.” 그들이 붙들러 나온 것은 분명히 예수를 생각하고 염려해서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이 예수님에게 정말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주님에게 정말 필요한 일이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거나 필요로 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모르고, 그가 미쳤다고 생각해서 자칫하면 큰일 날까봐 빨리 쫓아와서 데리고 가려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일을 걱정해서 한다고 하지만 정작 주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오히려 반대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가족들이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잡으러 왔던 것처럼, 우리도 교회에 오래 다녔으니까, 직분이 있으니까, 교회에 대해 너무나 잘 아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뜻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그냥 내 생각에 맞다고 하는 일, 내가 원하는 일인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을 원치 않을 때에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인지, 아니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점검하지 않을 때 자칫 잘못하면 주님의 뜻과는 반대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래 전 제가 이민을 와서 대학을 졸업한 후 졸업선물로 고국 방문을 갔습니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를 갔더니, 떠날 때는 대학부였는데 그때 가보니 친구들이 청년부가 되어서 청년부 예배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때 마침 청년부 담당 목사님이 주님의 뜻이 뭔가에 대해 설교를 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이 뭡니까?”
거기 대부분이 싱글 청년들이었으니까, ‘나의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남자/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청년들은 “그래서 내 배우자는 누구라는 말입니까?”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서(사람, 상황, 사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줄 수 있으시지만, 가장 주된 도구는 주님의 말씀, 즉 성경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정기적으로 묵상하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데 관심이 없다.”라는 말과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고 아직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하는 분은 괜찮지만 ‘나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읽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대로 행하며 살 것 아닙니까?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마태복음에 읽어보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자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는데 이렇게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갑자기 탁 펴서 짚으며 ‘아, 이것이 오늘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까?’라고 합니다. 무슨 점치듯이 요행을 바라며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 짚은 말씀이 별로 안 좋아하는 내용이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며 또 다시 합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태도가 아닙니까?
정기적으로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에만 주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내 생각에 주님이 이것을 원하시겠지’가 아니라, 확실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말씀대로,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가족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비난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2절)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는 귀신의 왕 사탄에게 붙들렸다.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온 것이다.” 바알세불이라는 것은 귀신의 왕인 가나안 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힘을 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3-26절)
이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 나라나 집안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분쟁하면 제대로 설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탄도 스스로를 대적해서 분쟁하면 사탄의 나라는 설 수가 없다.”
한 나라 안에 내전이 일어나면 얼마나 힘들고 그 백성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이라크 전쟁이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힘듭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한국전쟁을 겪으셨지만, 남북이 싸우는데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은 지는 그런 게 아닙니다. 다 힘듭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입니다. 월남전도 그렇고,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무질서가 온 나라를 휩쓸게 됩니다. 치안이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지금 한 판 붙었다면, 그 집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부모와 자녀가 서로 싸웠다면, 싸늘한 공기가 그 집을 채우게 되고, 모두가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싸운다고 그 집 아이가 ‘나는 안 싸웠으니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부가 싸우면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아빠 엄마가 이혼하면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하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동심리학자들이 다 그렇게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사탄의 세계도 똑같다는 겁니다. 그 안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으면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망했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날뛰고 있고 큰 세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의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라는 점을 예수님은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7절)
이것도 정리해보면, 어떤 강한 자가 있는데 그의 집안에는 그가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그 집 물건을 탈취하길 원하는 사람은 그 주인을 결박하고 나서야 그렇게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두 번째 사람이 그 강한 집주인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 강한 자는 사탄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탄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고, 또 그렇게 강하다고 하는 사탄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강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어느 단체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 팀에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어느 팀에 몸값이 높은 스타들이 많아도 팀이 단결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모래알과 같은 조직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슈퍼스타는 없더라도 선수들이 서로 하나 되어 단결해서 우승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서로 싸우고 시기하고 분열이 있는 팀이 우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교회 내에서 서로 성도들끼리 미워하고 다툰다면 어떻게 교회가 바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쁘다면, 어떻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서로 다투면, 관계가 불편하고 냉전을 한다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서 전도를 막고 있는지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가 무슨 전도의 기술을 알지 못하고 훈련도 별로 안 받았더라도 서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전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뜨겁게 부흥회를 하면”? “너희가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로 노래하고 기도하면”? 아닙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의 제자이구나”라고 알아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끌어안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잘못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실수할 가능성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잘못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잘못된 일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말을 탁 던졌을 때, ‘이 사람은 아주 못된 사람이군.’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 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을까?’라고 하며 그 사람과 잘못된 일을 따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 잘못된 일이 곧 그 사람 자체는 아닙니다. 따로 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다 느끼시겠지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100% 옳은 사람이 없고 100% 잘못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좋게 또는 안 좋게 보일 뿐이지,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이나 완전히 잘못된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사랑해도 비판하거나 잡아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함이지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른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의로운 분노로 시작한다고 해도 자꾸 변질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또 하고 해야 합니다. 정말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랑으로 그 사람에게 나아가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서 바로 잡아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없이 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정말 사랑으로 가는 건지, 미움으로 가는 건지를 주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확실하게 점검하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용서받지 못할 죄 (28-30절)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답을 하신 다음, 아주 심각한 말씀을 하십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28-29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신성 모독을 포함하여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고 영원한 죄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혹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닌가?’ 하면서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뜻을 우리는 반드시 잘 알아둬야 합니다. 잘못 해석하니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있습니까?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 못한다.’라고 하는 분이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은 누구나 용서하십니다 최악의 죄인도 용서해주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에 빠져 죽어라! 하하하!’라고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이외에도 이 비슷한 말씀들이 성경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라도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는 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30절)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사실과 다르게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없다고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사탄의 능력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에 보면 30절의 “그들이 말하기를”에서 “말하기를”이 한국어에는 없는 불완전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불완전 시제라는 것은 한 번 말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비방한 것이 한두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비방한 습관적인 태도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그러한 태도를 처음부터 가졌고, 바꾸지 않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미워하고 비방했습니다. 단순히 어쩌다가 한두 번 비판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고정되어 바뀌지 않는 미움과 강퍅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나중에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살인으로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반복된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인격이 되며, 인격이 운명을 바꾼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기를 원하시는데도 할 수 없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는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정확히 이야기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를 안 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님에 대해 고의적으로 마음의 문을 걸어 닫고 거부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선한 일을 악한 일이며 사탄의 일이라고 비방한 것을 말합니다.
서기관을 다른 말로 하면 ‘율법 전문가’입니다. 율법에 관한 한 도사였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주 촌 동네인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주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자기들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전통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가 미웠습니다. 그래서 귀신에 들렸다고 비방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끝까지 계속해서 그분에 대해 마음을 닫은 채 강퍅한 태도로 거부하다가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이렇게 대놓고 성령의 역사를 계속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압니다. 우리 중에는 고의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직접적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더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형제자매가 잘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마음이 있다면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주님이 기회를 주시지만 계속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면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하는데도 그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방해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단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내 스타일과 안 맞는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못하게 막는다면, 이 서기관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쉬운 말이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방식도 때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사람마다 기도의 스타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주 조용하게 기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나 철야기도 때 너무 조용히 기도하다 보면 다른 세상으로, 저 꿈의 세계로 갈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반면 어떤 분은 크게 기도해야 마음이 시원하기도 합니다. 이전에 있던 교회는 조용한 교회였는데, 새로 온 분들이 새벽기도 때 크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분들이 갑자기 몇 명이 왔습니다. 어떤 분은 방언을 하는데 “또록또록” 하는 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럴 수 있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분이 “주~~여, 덜덜덜덜.”이라고 방언을 하는데 좀 그랬지만 그래도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인데 때에 따라 기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젊은 두 남녀가 사랑의 속삭임을 할 때는 군대에서 소리 지르는 것처럼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하며 부드럽게 사랑을 속삭입니다. 반면, 물에 빠진 사람은 조용히 구해달라고 하지 않고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불났을 때도 “불이야!”라고 소리 지릅니다.
물론 우리가 이단은 거부해야 합니다. 성경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정말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목숨 걸고 싸울 것은 그냥 넘어가 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니 문제가 많이 일어납니다.
전쟁하는 군인들이 한 사람은 “이쪽에 총을 쏴야 한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아니다, 저쪽에 쏴야 한다.”라고 하며 다툴 수는 있습니다. 적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의견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자기가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이쪽이다 저쪽이다 다투다가 상대방에 대해 화가 난다고 해서 서로를 향해 겨누고 쏜다면 그것은 살인입니다.
서로에 대해 조금만 마음을 열고 양보할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다면,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것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그를 괴롭게 하려고 밖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바울에 눌려서 바울만 스타가 되고 자기들은 인정을 못 받았는데, 이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열심히 해서 자기들이 스타가 되니까 바울이 질투하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여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에이, 나쁜 놈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빌 1:18, 새)
이 얼마나 놀라운 태도입니까?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섬기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참 가족 (31-35절)
예수님은 결국 가족으로부터도, 서기관들로부터도 이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두 부류 모두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아는데 실패했습니다.
가족들은, 먼저 목수의 직업을 버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다니며 여러 기적들을 일으키는 것들이 오히려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부친 요셉은 이미 죽었을 것이고 장남인 예수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엉뚱하게 선생이 되어 유랑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다니는 것을 보면서, 혹시 이전에 있었던 정치적 세력처럼 사람들의 인기를 끌다가 결국엔 멸망당하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서기관들로부터 사탄의 힘을 입어 사역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강하게 반박하셨는데, 그것을 본 가족들은 더욱 걱정이 되어 다시 찾아옵니다. 그냥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1-32)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는 서기관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좋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잡으러 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이 있고 염려해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옳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틀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공부를 안 하면 부모로서 야단치기도 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 하는 것으로 야단치는 것은 드뭅니다. 그러나 부모로서 내 자녀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바른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가 토요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주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힘들어한다고 해보십시오. 그럼 부모로서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그래서 좀 쉬게 하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쉬게 하는 것이 정말로 아이를 위한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힘들어하니까 쉬게 해주고 싶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는 그게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래도 끌고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주는 것이 정말 내 아이를 위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와서 예수님에게 가족들이 왔다고 전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누가 자신의 가족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33-35절)
“내 가족은 주변에 둘러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가리켜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가족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은 육신적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적 가족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이 누군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곧 주님의 가족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가족이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이토록 사모하여 와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주님의 말씀을 진정 사모하여 듣기 원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이방인들, 로마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선포하시는 것은, 사람의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하느냐 아니냐가 하나님의 가족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한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어도(바리새인, 서기관 등),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면 주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 “누구든지” 출신 성분이나 혈통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가족입니다. 항상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서 설명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물론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믿음이 행위로써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바로 주님께 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주님의 가족인가? 혹시 겉으로는 주님의 가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뜻을 대적하는 사람은 아닌가? 우리가 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가 자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손자, 손녀가 없으시고 자녀만 있으십니다.
나는 진정 주님을 믿으며 그분에게 와서 그의 말씀을 듣는 데 힘쓰는 자인가? 나는 혹시 나의 직위에 속아 살지는 않는가? 이것을 늘 돌아보며,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행하여, 주님의 참 가족으로서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