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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2 추수감사주일예배

추수감사절 메시지

최악의 상황에서 드리는 최고의 감사

(욥기 1 13-22)



[들어가는 말]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두 마을이 이웃해서 살고 있었는데, 한 마을은 불평촌이고 다른 마을은 감사촌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사시사철 무엇에든지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았습니다. 봄에는 황사 때문에 먼지가 많다고 불평했고, 여름에는 너무 덥고 벌레가 많다며 불평했고, 가을에는 낙엽이 많이 떨어진다고 불평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춥다며 불평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겨도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의심하며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항상 불평 속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감사촌 사람들은 어떤 일에도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했고, 시련이 와도 감사했습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향기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감사했고, 가을에는 탐스런 열매를 감사했고, 겨울에는 나무 가지에 하얗게 쌓인 눈꽃을 감사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갔는데, 그곳 사람들이 말끝마다 감사하는 소리를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도 감사를 배워서 해보려다가 잘 안 되어 흉내만 내다가 늦은 저녁에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다리던 가족들이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감사촌에 갔었는데, 에이 거기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괜히 감사만 하고 왔네.” 이렇게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감사는 행복해지는 연습입니다.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입니다. 그런데 감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가장 초보적인 1단계 감사는 조건부(if) 감사입니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더 잘되거나 돈을 더 많이 벌거나 더 많이 가지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2단계 감사는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because) 하는 감사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여 내가 받은 것을 감사하는 단계입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감사가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무엇을 보고 이것 때문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3단계 감사는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감사하는 수준입니다. 사랑도 똑같습니다. 조건부 사랑, ~~ 때문에 사랑하는 것,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감사도 모든 악조건과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것이 최고의 단계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러한 최고의 감사, 감사를 드릴만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린 믿음의 선배들이 많습니다. 모두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상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고 상식을 뛰어넘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성경에 그런 분들의 모범이 많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도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했는데, 어디서 그랬는가 하면 감옥에서 그랬습니다. 지금 얻어맞고, 아프고, 다치고, 피를 흘리던 시커먼 감옥 속에서 감사의 찬양을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져지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본문에 나오는 욥이라는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풍성한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우리에게 도전과 갈 길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떤 사람인가?

 

 

1.  부자이면서 경건한 사람인 욥

 

우리가 욥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Job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잡’이라고 읽는데, 그렇게 읽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잡’이 아니라 ‘좁’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이 욥은 어떤 사람인가? 아주 극심한 고난을 겪은 대표적인 본이 욥인데, 욥기가 성경의 중간쯤 나옵니다. 에스더 뒤와 시편 앞에 나오니까 한참 뒤의 시대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데, 사실은 아브라함과 동시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BC 2000년 정도의 고대사회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욥은 엄청난 부자였지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모든 희망의 빛이 다 꺼진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세 친구들이 위로를 한다고 찾아와서 처음에는 위로를 하는 듯하다가, 논쟁으로 발전을 하면서 네 사람이 서로 논쟁만 벌이며 나중에 한 사람이 더 끼어들고,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이 결론을 내려주시는 것이 욥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읽을 때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부분을 볼 때 우리가 큰 교훈을 얻습니다. 욥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1)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엄청난 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1:3)

 

양이 70마리만 있어도 많은 건데 7천 마리, 낙타는 3천 마리, 소는 5백 겨리, 암나귀는 5백 마리나 되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이 동물들을 치는 땅은 얼마나 넓었으며 그들을 다루는 종들의 수는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시대에 가장 큰 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엄청난 돈과 빌딩과 부동산과 땅을 도시별로 갖고 있는 재벌입니다.

 

그뿐 아니라 2절을 보면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으로 자녀가 열 명이었습니다. 자녀가 많고 돈이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을 위해서 굉장히 힘쓴 영적인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1:4-5)

 

이런 부모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부모이신 분들은 이렇게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자녀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안 읽고 큐티 안 한다고 야단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공부 안 한다고 야단쳐본 적은 있으십니까? 우리는 보통 공부를 안 하면 야단치지만, 제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경우는 본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없습니다.

 

자기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고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너무 많지만, 욥은 이렇게 자식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경외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가 어디 흔하겠습니까? 욥은 이처럼 자녀들의 경건에 깊은 관심을 가진 아버지였고, 이것이 한두 번 한 게 아니라 항상 그랬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부모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은 남부러울 것 없는, 아니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부자였지만, 그런 인생을 살면서도 아주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로 살면서 이렇게 엄청난 거부이고 재벌인 사람이, 자기의 경건을 지킬 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까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도록 애쓰는 사람은 이 시대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주변을 보아도 그렇고, 어려움이 왔을 때 넘어지는 사람보다 일이 잘 풀릴 때 신앙적으로 넘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잘못 가는 경우는 대부분 일이 잘 풀릴 때입니다. 일이 어렵고 힘들면 어떻게든 하나님께 매달리지만, 일이 잘 풀리고 돈도 잘 벌리고 성공하고 높아지면 사람이 교만해지고 느슨해지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점점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가 부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가 생각이 달라집니다. 심지어 화장실 가기 전과 간 다음에 생각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출세하고 성공하면 마음의 중심이 God에서 Gold로, 즉 하나님에서 돈으로 중심이 옮겨집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6-12절을 보면, 사탄이 하나님 보좌 앞에 오는데,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하실 정도였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최고의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한꺼번에 엄청난 불행을 겪게 된 욥

 

그런데 이렇게 재물로도 엄청난 부자였고 영적으로도 너무나 경건한 사람이었던 욥에게 네 가지 불행이 한꺼번에 닥쳐옵니다. 하나씩만 봐도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었지만, 더 힘든 건 뭐냐 하면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데, 아무 잘못도 없고 아무 이유가 없지만 이렇게 엄청난 불행이 임했다는 것, 그것도 남들이 당할 수도 없는 엄청난 불행이 임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실 욥을 힘들게 한 것은 불행 그 자체보다도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기 전체에서 자기에게 닥친 고난의 이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욥기의 내용입니다.

 

먼저,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립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잔치를 벌일 때 사람이 와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합니다.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4-15절)

 

소와 나귀를 갈고 있는데 종들도 다 죽고 딱 한 사람만 도망왔다는 겁니다. 엄청난 재산의 손실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종이 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절)

 

이거야 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다는 것은 번개가 친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아 다 죽은 겁니다. 그때 또 다른 소식이 옵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절)

 

그렇잖아도 지금 연이은 소식에 충격을 받고 있는데, 갈대아 사람들이 나타나서 가장 소중한 재산인 낙타 3천 마리를 다 빼앗고 종들을 다 죽였다는 것입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욥이 최고의 부자에서 한꺼번에 다 잃어버린 거지가 된 것입니다. 전 재산을 순식간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비극이 또 일어납니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18-19절)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음식을 먹는데 갑자기 닥친 강한 바람(아마도 토네이도) 때문에 다 죽었다는 겁니다. 부모들이 다 그렇겠지만, 욥은 이미 우리가 본 것처럼, 혹시 내 자녀들이 마음으로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까 항상 걱정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늘 번제를 드릴 정도로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끼던 자녀들이 한꺼번에 열 명이 다 죽었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은 것도 충격이지만, 자녀들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입니다.

 

또 2장에 보면 몸에 피부병까지 생겨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을 정도로 굉장히 힘든 상황이 됩니다. 다 잃었어도 건강한 몸이라도 있으면 다시 일어날 텐데,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다 종기가 생겼습니다. 얼마나 가려웠으면 그렇게 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재산을 다 잃고 자녀도 다 잃어버리고, 잠도 못 자고 몸을 긁고 있는 그 모습을 본 그의 아내가 저주의 말을 쏟아냅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2:9)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래도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라는 말은 “이런데도 하나님을 믿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러시나?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다.’라고 하며 신앙을 멀리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보통 재앙이 아닙니다. 이런 불행이 닥쳤으니 그 아내가 “당신이 지금 이런데도 하나님을 믿겠느냐? 하나님을 그냥 욕하고 죽어라.” 이 얼마나 독한 말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이제 그 하나님 그만 믿고,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죽어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당한 남편에게(물론 그 아내도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서로 위로해주지 못하고) 저주를 퍼붓는다는 사실이 욥에게 가장 힘들었을지 모릅니다.

 

 

3.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린 욥

 

욥에게 이런 엄청난 네 가지 재앙이 한꺼번에 벌어졌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씩만 와도 견딜 수 없는데 네 가지가 한꺼번에 오니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반응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쓰러질 겁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했는가? 놀랍게도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정말 놀라운 믿음의 사람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도 이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로 욥이 한 일은 예배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0절)

 

그 당시 사람들은 가장 슬프고 괴로운 일을 당하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자신이 아주 엄청난 슬픔에 빠졌다는 것을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행위로 표현합니다.

 

슬픈 일을 당할 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슬픔을 당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믿음으로 버틴다고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말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울었는데 우리가 왜 못 웁니까?

 

슬플 때 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안 믿는 사람처럼 아무 소망이 없는 것 같이, 다 끝난 것처럼 막 무너진다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슬픔을 당할 때 눈물을 흘리는 것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잘못된 말 중에 하나는 “남자는 세 번 밖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인데,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하품도 세 번 하면 세 번 눈물을 흘립니다. 매일 하품을 하는데 어떻게 세 번만 눈물을 흘립니까?

 

눈물을 흘리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켜줍니다. 어쩌면 눈물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지 모릅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 눈물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물만 흘리고 무너져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땅에 엎드려 예배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앉거나 일어나서 예배하지만 마음으로는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인생의 아주 깊은 밤을 만난 욥이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아갔을 때, 슬프지만 슬퍼하면서도 예배로 나아갔을 때, 욥은 하나님 앞에 최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1절)

 

욥은 인생의 핵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핵심 진리가 뭔가 하면, 알몸으로 태어나 알몸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요즘 말로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것을 보셨습니까? 다 알몸으로 태어납니다. 죽을 때도 시신에 옷을 입혀서 그렇지, 사실은 알몸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알몸으로 온 우리에게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옷장을 열면 “왜 입을 게 없어?” 신발장을 열면 “왜 신을 게 없어?” 알몸으로 왔지만 이렇게 많은데 왜 없습니까? 떠날 때는 다 두고 갑니다. 억만금이 있으면 뭐 합니까? 떠나면 다 두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자기가 다 갖고 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움켜쥐고 집착을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욥은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그 많은 것을 다 잃었지만 담담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뭐라고 합니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다”라고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겁니다. 자기는 왜 그런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 겁니다.

 

욥은 자기가 노력과 수고만으로 이 많은 물질과 자녀들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성공하면 자기가 잘해서, 자기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게 어떻게 전부 다 내 노력으로 된 겁니까?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연결, 연결시켜주신 것이 찾아보면 다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혼자서 성공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욥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엄청난 부자가 되었었지만 그것은 결코 자기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이 많은 물질과 자녀들을 주시고 풍성하게 누리도록 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낮도 있지만 밤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칠흑같이 캄캄한 밤도 있습니다. 그런 인생의 밤 가운데에도 하나님은 노래하게 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밤 중에 욥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의 뜻을 그가 정말 신뢰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감사입니다.

 

 

세 번째로 욥이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2절)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는데 특히 입술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특히 말이 중요합니다. 욥이 범죄하지 않았다고 할 때, 마음도 그렇지만 특히 말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이 탁 생길 때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실까?’ 하며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 안 들면 토를 달고 따지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건 왜 이럽니까? 이건 또 왜 이럽니까?”

 

그런데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너무 놀라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정말 믿었습니다. 완벽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을 정말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하면 한마디 할 만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하고 야단치며 싸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너무 놀랍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2:10)

 

여러분, 이런 식으로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하고 나오면 막 야단을 칠 수 있습니다. 욥이 한 말을 잘 보십시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야!”라고 야단을 쳤습니까? 자세히 보십시오.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누가 나에게 말을 툭 하면 “당신은 사람이 덜 돼 먹었어.” “당신은 나빠!”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당신이 어리석다.”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말은 어느 어리석은 여자가 한 말과 같다.”라고 합니다. 자기 아내와 말을 따로 분리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시각입니까? 우리도 화가 날수록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게 못 됐냐? 왜 그렇게 나쁘냐?”가 아니라 “방금 한 말은 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과 그의 말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욥의 아내는 그대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욥의 아내도 믿음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욥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욥의 아내는 변했는데 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때 입으로 범죄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하필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은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입술을 열어 범죄하기가 제일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더 나아가 부모를 원망하고, 시대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고, 자녀를 원망합니다.

 

그러나 욥은 인생의 밤을 만났을 때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아내를 원망하지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상황에서 드리는 최고의 감사입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결국 욥은 나중에 최고의 복을 받습니다.

 

물론 잃어버린 자녀에 대한 아픔이 어떻게 없어지겠습니까? 평생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전에 가졌던 것의 배로 채워주시고, 무너졌던 아내도 회복되어서 그 아내와 같이 자녀들을 많이 나아서 또 일곱의 아들과 딸 셋을 얻는 복도 받습니다. 이처럼 욥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림으로써, 최고의 복을 받는 영광을 누리며, 몇 천 년이 지난 우리에게까지도 인내의 본보기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린 욥을 우리의 본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약 350년 전 사람들인 청교도들입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전통이 오늘까지 내려와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이 청교도들은 일곱 가지 감사의 조건을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 180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지만 그 배라도 주심을 감사합니다.

2) 평균 시속 2마일로 항해했으나 117일간 계속 전진할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3) 항해 중 두 사람이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합니다.

4)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으나 파선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5) 여자들 몇 명이 심한 파도 속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됨을 감사합니다.

6) 원주민들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바다에서 표류했지만 결국 호의적인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상륙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 고통스러운 3개월 반의 항해 도중 단 한 명도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Thanksgiving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Thanks와 Giving입니다. 감사함과 드림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함으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나 자신은 지금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상황이 좋아서 감사합니까, 아니면 상황이 나빠도 감사합니까? 그리고 감사하기 때문에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Thanks 와 Giving입니다. Thanks는 있는데 Giving이 없습니까? 아니면 다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과 불안보다 더 강력한 파워가 우리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 파워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못 보는 것까지, 저 뒤에 뭐가 벌어지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최선의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지금 우리 가운데 열심히 일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힘든 순간이 오히려 우리가 인생에서 최고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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