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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5 주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8

포도주는 부대에

(마가복음 2 18-22)

 


[들어가는 말]

 

지난주 <새로운 삶> 공부 때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업에 오기 전에 금식을 하고 오시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 <생명의 삶> 공부 시간에는 ‘성령 체험의 시간’이 있어서 수강생들이 금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많이들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금식이 크리스천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금식이라고 하면 이 기회에 다이어트나 해보자고 ‘굶식’(?)을 하는데, 제대로 하는 금식은 유익을 줍니다. 영성을 기르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고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런 기도의 시간을 갖기 전에 금식을 하는 이유는, 밥만 굶는 게 아니고 금식을 하면서 먹는 데에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집중하며 마음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을 해보면 ‘내가 그 동안 너무 먹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썼구나.’ 느끼게 됩니다. 금식을 가장 오래 한 것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보통은 하루 정도 금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4시간 금식도 있고 36시간 금식도 있습니다. 3일 정도 금식하는 분들도 있고, 그 이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작정하고 하루에 한 끼씩 금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금식은 쉽지 않습니다.

 

오래 전 다른 도시에 있을 때 고난주간을 맞아서 3일 동안 금식을 하는데, 운전하여 집에서 교회로 가는 길에 레스토랑이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전에는 안 보였는데 금식을 하고 보니까 식당 천지인 것입니다.

 

 

1.   옛 것과 새 것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바로 금식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에 사람들이 와서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8절)

 

이 사건이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그랬다고 되어 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한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마가는 사람들이 질문한 것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식이 요구되는 경우는 1년에 딱 한 번입니다. 그 날은 속죄일이었습니다(출 20:10; 레 16장). 속죄일(Yom Kipur)에는 음식을 금하고 몸과 영혼에 고통을 가하면서 회개하여 죄를 씻고 속죄제를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의미의 금식은 원래 ‘참회를 위한 고행’과 그것을 통한 ‘죄로부터의 정결’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사항은 아니지만 특별히 참회가 요구될 때, 위기에 처해서 간절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상황일 때, 사람들은 금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과 자신의 소원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에스더서를 읽어보시면 대표적인데, 에스더가 한 유명한 말이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말살하려는 위기 앞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민족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또한 애도를 위한 금식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애도하며 금식을 선포합니다(삼상 31:13). 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금식이 1년에 네 번 있었습니다(슥 8:19).

 

이 모든 경우에 있어 금식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그 슬픈 마음을 금식으로 표현하며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에 대해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밥을 굶고 금식을 하면서 나머지 할 건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도 하고 스마트폰도 보고 비디오도 보면서 밥만 안 먹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금식이 아닙니다. 미디어도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위기상황에서 금식을 많이 했지만, 요즘은 금식이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어떤 위기상황에 닥쳤는데도 너무 느긋합니다. 아니면 위기가 와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더 먹습니다. 정말 하나님께만 매달리며 금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참 드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간절히 금식으로 나아가고, 공동체적으로도 금식하며 나아갈 때 거기에 파워가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한 주에 두 번씩 자발적인 금식을 했습니다. 율법에 정해진 것은 1년에 한 번인데 이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으니 얼마나 거룩하게 보였겠습니까. 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규칙적인 금식을 하며 회개를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제자들도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그냥 궁금해서 질문하는 게 아니고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9-20절)

 

일반적으로 “금식”은 복음과 반대되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런 유대교적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은 복음이 오기 전까지만 효력이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랑’은 물론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잔치를 벌일 때이지 슬퍼하며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날에는 금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가를 비롯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기억하고 정기적인 금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새 복음이 온 다음부터는 율법에 매여 있던 유대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복음의 그릇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을 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1절)

 

예수님의 새 복음이 온 다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그런 율법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복음을 담는 그릇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생베 조각” 그리고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의미하고,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적인 생각이라고 보통 해석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해석하고, 그것이 틀리지 않습니다. 사실 새 것을 넣으려면 새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22절)

 

이 말을 따서 일반 사회에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합니다. 또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하기도 합니다. 표어처럼 쓰는 그 말은, 새로운 것은 새로운 것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로 씁니다. 새 것을 넣어두기 위해서는 새 것이 필요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새로운 것이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옛 것이니까 다 없애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짓기에는 뭔가 온전하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잘 보면, 새것뿐만 아니라 옛 것 즉 낡은 것도 상하면 안 되고 함께 보존하려 하시는 뜻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헌것과 새것’이라는 두 개의 개념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베 조각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일반적인 해석대로 새로운 가치관은 새로운 틀에 넣어야 하고 낡은 부대는 버려야 한다고 하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를 새롭고 좋은 가치관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두 가지가 새롭고 좋은 것을 상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생베 조각’을 원문의 의미 그대로 보면 ‘아직 빗질 하지 않은 새 천’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직 손질이 끝나지 않은 미완성의 천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베 조각은 그 성질이 매우 질기고 부드럽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비를 맞거나 물에 젖으면 딱딱하게 굳어 못쓰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마가복음을 읽던 1세기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생베 조각’이라는 말을 보면서 무조건 그것이 신선하고 좋다고 느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흔히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래 묵은 포도주가 새 포도주보다 더 좋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식입니다. 금방 담근 새 포도주는 시고 맛이 없고, 오랜 숙성 과정이 필요합니다.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 부대에 들어갔을 때 부대가 펑 하고 터지는 것은, 사실 낡은 가죽 부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새 포도주가 아직 숙성이 덜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다 보니 ‘카’ 하고 계시다면 좀 의심스럽습니다.

 

당시 ‘새 포도주’가 당시의 성도들에게 ‘새롭고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주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새 포도주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한다.” (눅 5:39, 새)

 

정리해 보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새롭고 좋은 가치관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히려 미숙하고 어설픈 어떤 것을 상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

 

그렇다면 이런 관점을 가지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에 대해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낡은 것들은 흔히 생각하듯이 버려야만 할 것들인가?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읽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약간의 염려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를 염려해주고 계십니다. 생베 조각을 붙이면 낡은 옷이 해어지니까 그러면 안 되고, 낡은 가죽 부대도 새 포도주를 넣어 터지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와 더불어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까지 모두 마음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맥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무엇이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레위가 너무 감사해서 자기 집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식사하며 잔치가 벌어지는 즈음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그 레위 사건 때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6절)

 

왜 세리들과 죄인들과 같이 먹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같은 종류라는 것이므로, 예수님을 똑같은 종류라고 보며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7절)

 

그러나 사건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이 와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것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에는 불만이 없습니다. 자기들의 리더인 세례 요한도 가난한 사람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만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흥청거리는 파티 분위기 속에서 세속적인 향락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세례 요한 쪽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아주 금욕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인 것은 좋은데 그 다음에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엄격한 금욕생활을 가르치고 영적 훈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하시지 않고 그들과 즐기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레위와 그의 세리 친구들과 다른 죄인들은 예수님을 사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아직 세상의 물이 싹 빠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막 만나서 변화되어 볼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막 예수님께 나오기 시작한, 요즘 말로는 초보신자들에게 갑자기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너희의 신앙 수준에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너희 식으로 거룩하게 살라고 미리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강요하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그들도 괴롭고, 또 신앙이 오래된 너희도 갈등이 생기게 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들을 담을 만한 수준의 틀이 필요하다. 그러는 가운데 이런 초보신자들도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성장하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늘 생각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교회는 어떻습니까? 특히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을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 믿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가 낮습니다. 우리 중에도 어릴 때부터 믿은 분들도 계시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믿은 분들도 여기 계십니다.

 

그런데 보통 기존의 교회에서는 초신자가 처음 오면 바울처럼 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사울이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다메섹(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고 고꾸라져서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즉시 거룩한 성도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알려주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라.” 하지 않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하셨습니다. 마음을 여시면서도 바른 길로 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 있어서는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단번에 확 변하겠습니까?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부르는데 사랑에 대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정말 사랑한다면 오래 참아준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며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빨리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실 자기도 그렇게 변화되지 못했으면서 남들은 빨리 변화되라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제가 <생명의 삶> 성경 요약 숙제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롬 14:1-3, 새)

 

예를 들어, 어떤 분이 몇 십 년 동안 술 담배로 찌들어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교회에 나왔다면,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 모든 것이 다 끊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지난주에 처음 교회에 나온 그 사람이 길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내가 봤다면, 마치 간첩을 잡은 것처럼 수군거리며 ‘그 사람이 담배 피우더라’ 한다면, 새로운 교우들을 배려하시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려고 하시던 예수님의 태도와는 얼마나 거리가 먼 마음이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온 적은 거의 없지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온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동네에서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왔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입만 열면 욕이 나오는 사람이 오늘 우리 교회에 왔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평생 고스톱 치고 가서 당기고 춤추러 다니던 사람인데 우리 교회에 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평생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술 취한 채 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를 울긋불긋 초록색, 핑크색, 빨간색으로 염색한 젊은이가 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나아가 입과 코와 눈에 구멍을 뚫은 청년이 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민망할 정도로 딱 달라붙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저 자신부터가 솔직히 힘듭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왔을까?’ 하고 불편해집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소위 ‘모범생 증후군’이 있어서 조금만 삐딱한 친구를 봐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초기에 지금 알지도 못하고 딱 한 번 나왔던 청년인데(믿는지 안 믿는지도 모르는데),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어떤 어른이 보고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모자를 쓰고 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 청년이 화를 내며 가서 다시는 안 왔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까, 그 형제가 그 날 늦게 일어났고 ‘오늘은 교회를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 그래도 모처럼 가보자고 생각하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늦게 일어나 샤워도 못했으니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예배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신 분은 단지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고 막 야단을 친 겁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물론 야단을 친 분도 좋은 마음으로 그랬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경건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원칙은 당연히 맞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랬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아주 세속적이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목장에 왔다면, 일단 그 사람의 개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예수님이 이 형제자매를 위해 돌아가실 정도로 고귀한 영혼이라는 것, 그렇게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사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립니까? 몇 십 년 동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겠습니까? 점점 변해가는 겁니다. 그 변화의 기간은 평생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혹시 평생 그 모습이 아주 많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먼저 믿은, 오래 믿은 성도들이 그들을 용납하고 그들이 편하게 교회를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눈물이 나게끔 하는 말씀이 로마서 15장에 또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롬 15:1-3, 새)

 

예수님이 자신에게 좋은 대로만 하셨다면 우리는 다 지옥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들의 죄악 된 lifestyle 자체를 받아들이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영혼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요 8:11, 새)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하신 그 음성이 바로 모든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를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사상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있지만, 동시에 이제 막 믿음의 길에 들어서서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이 세리와 죄인들에 대한 말씀으로도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사상’입니다.

 

옛날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옛날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가망 없는 죄인들입니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이 생베 조각, 새 옷, 새 포도주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더 자라고 성숙해져야 하지만 아직은 미완성인, 아니 이제 막 신앙의 길을 시작한 초신자들입니다.

 

반면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세례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처럼 오래된 성도들, 신앙의 전통과 관습과 경건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들이 결코 악하거나 거부할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도 중요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중요한 것입니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물론이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도 예수님은 다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둘이 서로 대립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는 일이 생기기를 주님을 원치 않으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것이 바로 새 가죽 부대입니다. 새 부대라는 것은 새 포도주가 숙성될 때까지 담아 둘 수 있는, 다시 말해 아직 교회의 관습에 익숙하지 않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 사극에 나오는 언어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초보신자들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위해서 많은 교회들이 소위 열린 예배라는 것도 하고, 경배와 찬양곡을 부르고, 우리처럼 목장을 하거나 셀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막 제자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하는 초보신자들에게 세례 요한식의 거룩함과 금욕을 가르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호흡할 수 있는 흥겨운 잔치 자리를 통해 그들의 마음을 먼저 여시고 깊은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결론으로 나오는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는 말씀을 통해 둘 다 보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옛것이나 새것 모두가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옛날의 전통과 율법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죄인이라고 여겨졌던 사람들도 들어와서 함께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런 공동체를 생각하셨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성령을 받고 나서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같이 모여서 내 것, 네 것 없이 다 나누어 쓰고 사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셨던 바로 그 교회, 새로 믿고 들어온 사람과 기존의 성도들이 함께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교회, 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에 있어서 무엇보다 저처럼 먼저 믿은 자들의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새 가죽 부대입니다.

 

 

[나가는 말]

 

세리와 죄인들을 데리고 기도와 묵상과 성경공부부터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흥겨운 파티로 시작하셨던 예수님처럼, 그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을 향해 열린 눈높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소식을 가진 곳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어떤 외국의 교회 지도자가 한국 교회를 방문해서 보니까 예배 때 다들 너무 심각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한국 교인들은 저렇게 심각해 보입니까? 왜 기쁘게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예배드려서 그렇습니다.” “아, 그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3일 만에 살아나신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보군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신앙은 곧 심각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즐겁고 행복하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관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람들까지도 얼마든지 거뜬히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장도 하면서 어떻게든 그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보자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까?

 

<생명의 삶> 공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함께 나누며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노부부가 오래 전에 신문에 사진이 났습니다. 노부부가 있고 자녀 몇 십 명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원래 자기 자녀는 두 명 있고 나머지는 다 입양을 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주로 다른 집에 입양을 갔다가 실패하여 고아원으로 돌아온 아이들만 골라서 입양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입양되어 왔는데 말을 안 듣습니다. ‘우리가 보나마나 곧 쫓겨나서 고아원으로 갈 테니까 정을 주지 말자.’ 하고 생각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막 깨고 엎고 어지럽히고 그러는데, 당시 젊은 부부인 그 아저씨 아줌마가 인자한 웃음으로 안아주고 용서해주면서 괜찮다고, 이제 그러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경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데 몇 주가 지나도 계속 품어주고 안아주고 괜찮다고 용서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이 이분들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들이 “아빠, 엄마”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날부터 이분들이 태도가 확 돌변하면서 “자, 이제부터 너희들 인간 좀 되어 보자. 이제부터 훈련이다!”라고 하며 훈련을 시켜서 아이들이 너무 훌륭한 사람이 되고 사회에서 잘되어 화제의 가족이라고 신문에까지 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 주님께 나와 볼까 하고 나왔는데 처음부터 스파르타식으로 뺑뺑 돌리고 그러면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막 말썽부리면 무조건 회초리로 때리고 벌주고 그러면 어떡합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처음에 몰라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러면 품어주고 안아주시며 “괜찮아. 다음에는 그러지 마.” 웃으면서 인자하게 해주십니다. 그러다 드디어 “주님,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니까 “그래, 이제부터 인간 좀 되어 보자.” 하며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게 거꾸로 되었으면 어떨 뻔했습니까?

 

바로 이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서로를 향해 그렇게 하며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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