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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MjwYv_3YN9U?t=1832

 

 

2022320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1

다급한 순간에 임한 구원의 손길

(사무엘상 291~11)

 

[들어가는 말]

 

제가 미국에 이민을 온 지 어느덧 35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이전에 오신 분들도 계시고, 심지어 우리 교회에는 1950년대에 미국을 오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 거의 70년이 된 것이니 굉장히 오랫동안 미국에  살교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 1970년대만 해도 미국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아는 사람들 중에서는 코리아는 미군이 참전한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시아의 작은 나라 정도로 알았습니다그러던 중 1971년 성탄절에 코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미국 사람들의 뇌리에 아주 강하게 박히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입니다. 당시 사망자가 160명이 넘었고,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투숙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최고급 호텔에 투숙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보니까 경보가 울리고 사람들이 난리입니다. 저쪽에서 시뻘건 불길과 함께 연기가 몰려옵니다.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 불길을 피해보려 하지만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구석으로 몰려 창가까지 왔는데, 보니까 저 아래가 까마득합니다. 문밖에서는 시뻘건 불길과 까만 연기가 몰려옵니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갈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을 가리켜 진퇴양난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바로 그러한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을 봅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과연 빠져나갈 길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이한 다윗 (1~5)

 

우리가 지난번 27장을 살펴본 다음에 28장은 다루지 않고 그냥 넘어갔는데, 거기에는 사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단히 그것을 요약하면, 사울은 그 전에 무당이나 신접한 영매들을 다 쫓아냈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안 해주시고 사무엘도 죽어서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급해지니까 신접한 여인, 즉 무당을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구합니다(28:11).

 

그래서 그 여인은 한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28:13).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니까 그 여인이 말하기를 노인이 겉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곧바로 사무엘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절합니다(28:14). 하지만 사실 노인이 겉옷을 입은 사람이 한둘입니까? 그런데 어ᄄᅠᇂ게 바로 사무엘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한 군데 꽂혀 있으니까 그것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무엘이 말했다고 하니까 헷갈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이 사울과 대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해석하기가 아주 힘든 본문이고, 이것이 사무엘이 맞는다면 신학적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됩니다. 사무엘은 한참 전에 죽었는데, 어떻게 신접한 여인(무당)이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고, 또 어떻게 사무엘의 영이 사울과 대화를 한다는 말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사무엘의 영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의 영이 그렇게 땅에서 다시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 땅에서 죽어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힌트를 주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마지막 고난주간 중에 찾아와서 도전을 했습니다. 일곱 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자식 없이 죽어서 율법에 있는 형사취수제도에 의해서 그 둘째가 형수를 취하고, 둘째가 죽은 다음에는 셋째가 취하는 등, 일곱 명이 모두 아내로 삼았는데 다 죽고 여자도 죽었으니, 부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물은 질문입니다(22:23-33).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 오해한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로서, 모세가 떨기나무 불 앞에서 부르심을 받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신 말씀을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모세에게 소개하셨다는 겁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옛날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는데, 그들은 다 죽었으니까 이제는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신 게 아니라 지금도 그들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에 부활하여 살아 있다고 하신 것이라고 예수님이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도 죽었지만,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영이 어떻게 땅에서 올라옵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사탄의 장난일 뿐입니다. 악한 영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사무엘이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노인이 겉옷을 입고 나왔다고 했는데 사울은 바로 사무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사무엘의 영이 아닙니다.

 

지금도 신내림을 받은 강신 무당들이 굿을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위한 굿을 할 때 그들의 목소리 비슷하게 내면서 내가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더 내놓아라. 더 내놓아라.’ 하면서 자꾸 더 바치게 합니다. 그게 진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죽은 순간 그 운명은 끝이 났고, 그것은 귀신이 장난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야기가 28장에 나와서 다윗 이야기의 흐름을 끊습니까? 그것은 사울이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전사하게 된 실패가 단순히 군사력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28장 첫 부분에서부터 연결이 됩니다. 1-2절을 보면 아기스는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나가는 전투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도 함께 나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자기와 함께 나가 싸우면 자기가 다윗을 영원히 자신의 심복으로 삼겠다고 합니다(28:1-2).

 

사울이 영적으로 실패하는 동안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향해 총공격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블레셋은 엄청난 공격을 해오려고 전열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사울은 가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군사들을 준비시키며 전쟁을 대비해야 했던 그때에 신접한 여인이나 찾아가 있으니 실패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블레셋의 작전은 그동안 부분적으로 여기 찌르고 저기 찌르던 것 같은 국지전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골리앗이 나갔다가 다윗에게 패배하여 블레셋 전체가 패한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벌이는 전면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양 진영이 평야 같이 넓은 곳에 서로를 마주 보고 진을 친 후 싸웠습니다. <반지의 제왕> 같은 데에서 전투 장면이 나오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특히 이 전쟁은, 샘이 있고 비옥한 이스라엘 중부지방에 위치한 이스르엘 평지를 점령하지 않고는 국력을 키워나가기 힘든 블레셋이 그곳을 차지하려고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입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읍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 쳤더라” (1)

 

이제 다윗은 블레셋 용병으로 자기 동족과의 전쟁에 동원될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 동안 숨기고 있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다윗의 속마음이 탄로 날 위기가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말렉 같은 민족들을 공격하여 약탈해왔으면서도 이스라엘 지역을 쳐서 약탈해 왔다고 아기스를 속였었는데, 그 말을 믿고 자신을 신뢰하게 된 아기스와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정말 엄청난 위기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싸우지 않으려고 하면 자기 정체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 수 있고, 싸우게 되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움으로써 이제는 정말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기름 부음 받아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세움 받은 사람이 자기 동족과 싸워 죽이게 되니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이때 다윗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실 이러한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다윗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사울이 쫓아오더라도 이스라엘 땅 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이 너무 힘드니까 견디고 견디다 못해 사울이 쫓아오지 못할 블레셋으로 도망가버렸습니다.

 

대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힘든 일을 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이 거기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셨든지, 아니면 고난이 끝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견디지 못하고 블레셋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중생활을 하면서, 아말렉 족속을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쳐서 물건을 약탈하고 그것을 아기스에게는 이스라엘 마을들을 쳤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때로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 어려움은 외부에서 올 때도 있지만 자기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어려움이 오는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계속되면 남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며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 또는 우리 집안이 안 좋다.’라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입니다.

 

또는 자기 잘못 때문에 상황이 힘들게 되었는데도 이 십자가는 제가 져야죠.’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다가 손해를 보고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라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못했는데 하나님,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고 불평하는 모습은 혹시 나에게 없는지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면 자꾸 외부를 보면서 남 탓을 하거나 상황 탓을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이 잘못한 게 없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나가게 되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재빨리 다른 데로 다시 도망가버리거나, 이때 블레셋을 공격해서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 다 다윗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도망을 할 만한 곳도 없습니다. 또한 블레셋 땅 안에는 자기와 부하들의 가족들과 재산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충성심을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에게는 지금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다윗이 마음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 아기스 앞에서 위협을 느끼고 미친 척했을 때도 그렇게 속으로 기도했는데, 이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블레셋 군대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블레셋 지도자들이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것은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하나님이 뜻밖의 방법으로 다윗을 구해주신 손길입니다.

 

블레셋은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된 나라인데, 평소에는 자치적으로 각 도시가 알아서 모든 것을 처리했지만 전쟁이나 종교적인 행사는 모두 연합해서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가 자기 성에 다윗을 데리고 있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성에서 자기 부하로 데리고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온 블레셋이 다 합쳐서 나가는 전쟁이기 때문에 다른 블레셋 도시들에서 온 장군들이 심하게 반대합니다. 아기스는 다섯 개 도시 중 가드 왕이었고, 그 외에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아스돗에서 온 장군들이 심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왜 반대합니까?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2)

 

수령들은 각 성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디 있습니까? ‘그 뒤에서’. 그러니까 일단 다윗이 자기들 뒤에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앞에 서서 나가지 않고 뒤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스가 그를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282절을 보면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번에 성공하면 영원히 나의 머리 지키는 자로 삼겠다.’라고 하는데, 머리 지키는 자가 바로 경호대장을 말합니다. 다윗은 이미 아기스의 경호실장이었기 때문에 아기스 옆에서 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앞에 나가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니라 아기스와 함께 뒤에서 갑니다. 아기스가 뒤에서 갔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앞에서 나가게 되었다면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임을 얻어서 아기스 군대가 위치한 뒤에서 아기스와 함께 갑니다. 이것부터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냥 보면 우연한 일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도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그런 것이 믿는 사람의 시각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지 2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어렵지만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것은 결코 내가 잘나서라거나 내가 잘 대처해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마스크를 내릴 때가 많은데, 그때 모르게 확진자가 지나가다 에취 하고 재채기 한 번 하면 그대로 걸리는 겁니다. 그런데 2년 동안 그래도 괜찮았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파서 고생한 분들도 계십니다. 오미크론 변이를 독감 정도라고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나 유명인들 중에도 오미크론에 걸려 굉장히 아팠다고 SNS에 올린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닌 게 아닌데, 그런 중에도 지켜주시고 또 걸렸더라도 낫게 해주신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윗처럼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데도 별일이 없다면, 걸렸어도 잘 나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참아주시면서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면,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참아주시며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길이 지금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로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이제 다윗이 뒤에 있기 때문에 저 앞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진 치고 있고, 또 자기들의 뒤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닙니까? 블레셋 방백들이 바로 이 점을 문제로 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이르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하니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3)

 

아기스는 다윗을 옹호하는 말을 합니다. ‘내가 경험해봤는데 아무 문제 없다. 아주 좋은 사람이다. 사울이 죽이려고 하니까 나에게 피해서 왔고 그 동안 나에게 충성했다.’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블레셋 방백들은 그에게 분노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4)

 

블레셋 방백들은 장군들입니다. ‘수령들은 아기스와 같이 블레셋 다른 도시의 왕들이고, ‘방백들은 실제로 나가서 싸우는 장군들입니다. 왕들은 그냥 넘어갔는데 실제로 싸우는 장군들이 이것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원이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들 중에는 다윗이 자기들의 용사 가드 출신 골리앗을 죽이던 장면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가드 출신인데 정작 가드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지내면서 괜찮다고 느꼈지만, 다른 도시에 있는 장군들은 다윗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같이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을 위험인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사울보다 더 위험한 이스라엘의 장수라고 생각합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이 전장에서 블레셋의 대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가 자신의 주인인 사울과 다시 화합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것을 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가장 좋은 길은 자신들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가져다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다윗은 자연스럽게 이 전쟁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우연이 잘 일어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연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블레셋 방백들은 이때 얼마든지 다윗을 끌어내어서 아예 죽여버리자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위험인물이니까 위험 요소는 처음부터 제거해버리자고 하며 다윗과 부하들을 일단 처형하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위험한 인물은 배신하기 전에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이야 민주적이고 법이 있지만 옛날에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냥 왕이 그러라고 하면 그러는 겁니다.

 

당시 전쟁할 때는 적군의 장군을 죽여 그 머리를 창에 꽂고 시작하면 적군의 사기를 꺾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록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의 장수인 것은 누구나 아는데, 다윗의 목을 잘라서 머리를 창에 꽂고 보이면 이스라엘 군의 사기는 그대로 떨어집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 다윗을 죽이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돌아가게 하라는 겁니다. 물론 아기스가 다윗을 아끼고 있기 때문에 죽이자고 하지 못한 이유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윗을 죽이자고 하는 대신 돌려보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이런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바로 그런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삶의 작은 일, 작은 연결고리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왜 여기 콜럼버스까지 와 있나?’ 여기서 10, 20, 30년 살고 있을 수도 있고, 금방 왔을 수도 있습니다. 공부하러 또는 일하러 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삶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심지어 마음의 생각까지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감시하려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바른길을 가기를 원하셔서 얘가 지금 어떤 결정을 하려나?’ 하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좋지 않은 결정을 하며 나가면 안타까워하시면서 어떻게든 잘되게 하시려고 그 길에 역사하시고, 좋은 결정을 내리면 너무 기뻐하시면서 참 잘했다! 내가 너를 더욱 인도해주겠다.’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21장에서 다윗이 도망자 시절의 초기에 바로 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는데, 그때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하니까 위협을 느끼며 미친 척해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블레셋 장군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바람에 또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장군들은 특히 이스라엘 여자들이 불렀던 노래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그 다윗이 아니니이까 하니” (5)

 

블레셋 장군들 중 전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상당수가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팝송(Israel Pop)아이팝’(I-Pop) 최고 인기곡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줄여서 사천다만’)이라는 노래를 블레셋 장군들이 기억한 겁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들의 노래가 중요한 여론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함으로 벌써 다윗을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지목한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국민가요가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다 부르는 노래가 된 것입니다. 사울이 화를 내며 다윗을 주목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이 그 때문입니다.

 

블레셋 장군들이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서 유순한 부하의 이미지를 본 것이 아니라, 굉장한 야심을 품고 감추고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를 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십여 년 전에 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 블레셋 방백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여인들의 <사천다만> 곡은 10년이 넘은 노래입니다. 여러분, 10년 전의 최고 인기곡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나는 곡들도 있습니다. 30년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당시 10대나 20대였던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겁니다. 9년 전 최고 인기곡도 있습니다. “오빤 강남스타일9년 전에 나온 곡입니다.

 

그러니까 10년 된 것이라도 굉장히 유명한 곡은 꽤 기억합니다. 하지만 <난 알아요><강남스타일> 같은 곡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블레셋 장군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아이팝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겁니다. 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노래를 기억합니ᄁᆞ?

 

하나님은 이스라엘 여인들의 그런 노래도 사용하셔서 다윗을 보호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심에 있어서 어떤 것도 다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필요하시다면 우리가 위기에 닥쳤을 때 <강남스타일>도 사용할 수 있으시고 <난 알아요>도 사용할 수 있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뭐든지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벌어지는 일들을 잘 보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놀라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2.   위기에 빠진 다윗을 구해주시는 하나님 (6~11)

 

블레셋 방백들의 강한 반발을 경험한 아기스는 이제 어쩔 수 없이 다윗을 전쟁에 데리고 나가는 일을 포기합니다. 이때 아기스는 다윗에게 그를 전쟁에 데려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진중에 출입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으나 수령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이제 너는 평안히 돌아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에게 거슬러 보이게 하지 말라 하니라” (6-7)

 

방백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그들의 수령들도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기스가 아주 난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장군들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른 도시 왕들까지도 다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을 불러 전쟁에 데리고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기스는 먼저 다윗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합니다.

 

아기스는 심지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까지 해가면서 자신을 향한 다윗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확인해줍니다. 그런데 다윗의 충성심은 인정하지만 그를 전장에 데려갈 수는 없다고 잘 양해를 구합니다. 블레셋 수령들이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이제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괜히 출정해서 블레셋 수령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인데 괜히 다른 왕들의 눈에 나면 좋지 않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앞세워 전공을 세우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창피만 톡톡히 당했습니다. 다른 블레셋 장군들은 모두 다윗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아기스만은 다윗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을 보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기스가 정말 다윗을 좋게 본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다윗이 아기스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기스가 깨닫지 못한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그의 눈을 가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다윗을 보호해주신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지켜주시기 위해서 아기스의 눈을 가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동일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혹시 우리가 이렇게 잘못 결정을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에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모든 것이 잘될 수 있도록 보호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게 되도록 인도해주십니다.

 

아기스가 이렇게 쩔쩔매며 자신에게 설명하고 있을 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자기가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속으로 감격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아기스가 자기를 부릅니다. ‘이거 혹시 지금 당장 최전방에 나가서 싸우라는 게 아닌가?’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갔더니 오히려 복음을 선포해줍니다. ‘돌아가라.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이제 살아난 겁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까 다윗은 예의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합니다. 오히려 큰소리를 칩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8)

 

집으로 돌아가라는 아기스의 말에 대해 다윗은 내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막 고맙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까지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어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게 되면 당장 아기스와 다른 블레셋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됩니다.

 

아기스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굉장히 지켜보면서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쩔쩔매는 것 같지만 이 사람이 보통 고수가 아닙니다. 왕의 위치까지 오른 사람들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지켜보고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하는데 다윗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니까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의심을 살까 봐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왜 나를 싸우지 못하게 막느냐?’ 하고 외칩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기스가 오히려 곤란해졌고, 그는 다윗을 설득하려 애쓰게 됩니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과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하니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과 더불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9-11)

 

새벽에 일어나서 떠나라고 하니까 다윗은 부하들과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납니다. 새벽에 쉽게 일어나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는 어렵습니다. 깜깜할 때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지 않은데, 다윗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하고 노래는 했지만, 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날 새벽만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잠을 못 자고 빨리 새벽이 안 오나?’ 했을 겁니다.

 

그래서 새벽에 바로 일어나 떠납니다. 아기스는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를 이유로 들며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하고, 다윗은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 시글락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이스르엘로 올라갑니다.

 

 

3.   다윗이 배운 교훈

 

다윗이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배웠을까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된 것은 자기가 알아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자기는 그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지만,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는 일생일대의 과오를 범할 뻔했습니다.

 

이때 만약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셔서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일을 통해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당장은 좋을 것 같아도 결국 얼마나 어렵게 되는지를 그는 생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하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하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았어도, 심지어 죄를 지었어도 별일 없던데? 괜찮은가 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별일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무사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는데도 별 탈이 없으면 괜찮은가 보다 하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구나.’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별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도 읽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괜찮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음대로 하는 것은 결코 괜찮지 않습니다. 분명히 언젠가 이런 결과로 올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지, 결코 내가 잘나서 괜찮은 것이라거나 그렇게 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처음에 블레셋으로 가서 환영받고 시글락도 얻었으며 또 약탈하러 다니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그것도 아기스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니까 블레셋으로 망명하기를 참 잘했다고, 참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기스의 눈을 가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이렇게 나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고,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냥 두시지 않고 지켜주셨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할 때 죄의 세 가지 정의에 대해서 배웁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불쌍한 사람을 조금 도와주는 식의 선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나는 죄인이 아닌데. 당신들이나 죄인이지 나는 죄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악한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나 살인범과 비교해볼 때 나는 전혀 그렇게 악하지 않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악한 사람들과만 비교합니까? 착한 사람들과 비교해보십시오. 그런데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과는 비교하지 않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남을 죽이지 않았고 때리지 않았고 사기 치지 않았고 또 가끔 불쌍한 사람을 돕기도 하니까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강도질도 죄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하셨습니까?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렇게 사랑하셨습니까? “네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하셨는데 100% 하셨습니까? 이런 것이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해주어라. 원수가 목마르면 마시게 해주고 배고프면 먹여주어라.” 그러나 우리는 잘하지 못합니다. 안 합니다.

 

야고보서 413절부터 보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야고보서 4:13-17, 새번역)

 

여기 사업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돈을 버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돈 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사업을 계획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계획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들의 진짜 문제가 뭐냐 하면 나는 내가 한 대로 다 된다. 내가 100이라는 노력을 하면 나는 100이라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하고 자기의 장래가 자기에게 다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계획한 대로 100%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 삶을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가 어떻게 컨트롤을 다 할 수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준비는 해야 합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그 결과를 그대로 얻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무슨 일이든지 100%의 노력을 한다고 100%의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100이라는 노력을 했는데 50이나 60이 될 수도 있고, 120이나 130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죄가 어떤 죄입니까? 선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죄는, 자기가 내일을 컨트롤 할 수 없으면서 자기가 계획한 대로 다 될 것이라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자기 손에 내일이 달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악한 일이고, 선한 일이라는 것은 내일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며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일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즉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가 하면 다 된다고 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면 바로 그것이 악한 일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정말 자기 머리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것을 그는 이 일을 통해 생생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면서 나아가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그리고 동시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는 맡기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손길을 체험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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