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991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1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사도행전 2115~26)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는데 거기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 적이 있으십니까? 또는 제대로 감사의 표현을 했던 적이 있으십니까? 반대로, 누군가에게 내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사람이 별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은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나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현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던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나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현하지 못했던 것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것에 제대로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거나, 내가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이 감사를 표현한 것은 기억이 잘 안 날 겁니다.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사실 사람은 대부분 배은망덕합니다. 돈을 꿔주면 빌려준 사람은 절대 안 잊어버리는데, 빌려간 사람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뭐든지 잘해주면, 해준 사람은 절대 안 잊어버리는데, 받은 사람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기가 받은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소수이지만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드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만약 내게 자격이 있어서 무엇을 받는다면, 내가 잘해서 받는다면, 그것은 나의 권리가 되거나 대가가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자격도 없고 오히려 심판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조건 없는 호의, 조건 없는 사랑, 즉 은혜를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정말로 깨달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크고 깊을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의지를 다해 그 은혜의 주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의 삶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지난주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잠깐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고도 어떻게 그렇게 사냐?’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동역자들과 전도자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이 고난을 당하게 될 자신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투옥을 당할 뿐 아니라 죽는 것도 각오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를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바울은 자기를 가리키며 사용한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심한 표현이 바로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는 표현입니다. 죄인 중에 가장 두목이라는 말입니다. 악질 조폭의 최고 두목과 같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죄인 중의 괴수를 멸망의 심판대에 세우지 않으시고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도로 부르셔서 사용하시는 은혜까지 베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처럼 주님의 은혜에 의지를 다해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변함없는 은혜로 계속 책임져주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   나손의 아름다운 섬김

 

이 여러 날 후에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15)

 

여러 날이 지난 후 마침내 바울은 결박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갑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이 약 60마일 거리입니다. 지금은 차로 가면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이지만, 당시에는 보통 사람이 걸어서 이틀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이미 인생의 노년기에 들어갔으며 그 전에 모진 고문을 많이 당하여 병약하고 쇠약한 바울에게는 걸어서 사흘이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그 먼 길에 오른 바울 일행의 수는 이전보다 더 늘어났습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16)

 

원래 바울 일행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 루스드라 출신으로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 그리고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할 마게도냐, 아가야, 갈라디아, 아시아 각 지역 교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이사랴를 떠날 때에는, 원래 일행에 더하여서 가이사랴의 몇 제자도 같이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나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브로 사람 나손은 오랜 제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보다도 먼저 믿었고 예수님 당시부터 믿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손이 바울의 일행에 합류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손은 예루살렘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바울과 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묵게 해주기 위해 가이사랴에서부터 함께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4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출발할 때 바울의 일행은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 여덟 명에다가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합류한 누가를 합치면 총 아홉 명이 됩니다. 거기에 또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따라나선 몇 제자까지 합치면 바울 일행은 최소한 십여 명, 약 열 대여섯 명이 됩니다. 한 집에 함께 머물기에 쉽지 않은 숫자입니다. 지금도 열 몇 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면 그 사람들을 머물게 하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나손은 그 많은 사람들의 숙식을 자기 집에서 해결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예루살렘에 큰 집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손은 부자였던 것입니다.

 

사실 부자는 따질 것도 많고 지킬 것도 많습니다. 보통 사람의 집에는 강력한 금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강력한 금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어디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누가 훔쳐가지 않을지 항상 전전긍긍합니다.

 

나손도 부자이니까 돈이 많고 지켜야 할 것이 많으며 도둑이 와서 훔쳐가지 않을까 항상 걱정이 많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바울을 위해 같이 갑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앞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을 당하고 투옥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과 그의 일행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에 묵게 해주기 위해서 가이사랴로부터 바울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부터 믿은 오래 된 제자라면 나손은 나이가 바울과 비슷하거나 더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기꺼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6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동행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바울이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부르신 주님의 은혜와 사명에 자기의 삶에서 믿음으로 반응했을 때, 주님께서 바울과 그와 함께 한 일행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숙소까지 책임져주실 정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주일 만에 체포를 당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 이송되어 총독 밑에 있는 감옥에 갇혀서, 2년 후 로마로 압송될 때까지 가이사랴 감옥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이 체포를 당하기 전까지 겨우 약 일주일 정도 머물 집을 마련해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60마일이나 떨어진 가이사랴로부터 바나바와 같은 구브로(사이프러스) 출신의 나손까지 동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헌신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삶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평범하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어느 정도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과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영역은 알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갑니다. 그런데 섬기는 사람들, 헌신한 사람들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상식을 초월하는 세계, ‘, 이런 세계도 있었나?’ 하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울이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하니까 어유, 힘들겠다. 주님을 섬기는 데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 힘들어서 어떻게 섬기겠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기꺼이 그 길을 간다고 합니까?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영역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헌신하면 저렇게 힘들지하며 거기까지만 압니다. 그래서 신앙이 거기까지입니다. 그것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을 알고 새로운 세계를 알고 놀라운 영역을 아는 바울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겁니다. 나아가다 보니까, 그렇게 상식을 초월하는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 같이 주님께 인정받는 위대한 사도를 위해 자기가 기꺼이 섬기고 자기 집을 내어주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그 무슨 낭비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 힘들게 60마일을 걸어오고, 왜 그렇게 힘든 일을 자초하느냐? 편하게 살지.’라고 합니다. 이게 보통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식을 초월하며 보통 생각을 초월하는 그 영역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맛보았기 때문에, 초월의 기쁨을 알고 섬기는 겁니다. 사실 기쁨을 누리려고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섬기다 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만족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부자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조금 더 벌고 싶다고 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보다 우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꽉 채워주십니다. 다른 것으로 아무리 채워보려 해도 안 채워집니다. 내가 더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는 채워집니다. 그래서 그 영역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나아갈 때, 나손이 누린 것과 같은 기쁨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 일행을 위해 집을 내어주고 섬길 때 나손이 , 되게 귀찮네라고 했을 것 같으십니까? 그 반대입니다. 너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너무 은혜가 넘쳤습니다.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으며 섬기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으로 그냥 만족합니다. 그냥 그 정도 선에서 끝납니다.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나 나손과 같이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으며 섬기는 사람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 세상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축복이 섬김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예루살렘에 교회 지도자들 앞에서 간증하는 바울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7-18)

 

드디어 바울은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도착하는데,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곳에 도착한 바울과 그의 일행을 기쁘게 환영하며 맞아줍니다. 십여 명 되는 일행을 아주 기쁘게 환영해주었습니다.

 

이튿날 바울은 우리라고 누가가 표현한 자신의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바울이 만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야고보 밖에 없습니다. 이 야고보는 122절에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참수형을 당하고 순교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이름이 사도행전에 처음 나오는 것이 마침 같은 12장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야고보를 죽이니까 유대인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신이 난 헤롯은 또 다른 중요한 리더인 베드로를 잡아 가둡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형을 당하기 바로 전날 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통해 아주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던 감옥에서 기적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곧장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는, 마가라 하는 요한(마가복음을 쓴)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소위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입니다. 거기 갔을 때 베드로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한 다음 거기에 없던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12:17) 하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여겨지던 베드로도 벌써 이때부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이름이 사도행전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본문이 15장입니다. 15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역사적으로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로 불리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던 교회 지도자들의 총회에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그때 공의회의 주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가하는 문제였는데, 그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단지 죄악된 것들을 멀리 하라. 유대인이 아니니까 굳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하고 최종 결론을 내린 사람이 바로 야고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그 역사적인 첫 번째 공의회의 의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여기에 안 나오는 것을 보면, 사도들은 이곳저곳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활 후 주와 구주로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지도자, 즉 요즘 말로 하면 담임목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19)

 

바울과 야고보의 이번 만남은, 15장에서의 만난 후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만났습니다. 전부 최소 네 번을 만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심 후에 예루살렘에 가서 만났고, 안디옥 교회의 구제금을 전해주면서 가서 만났고, 예루살렘 공의회 때 만났고, 2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잠시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네 번 정도 이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야고보를 만났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이때는 15장의 공의회로부터는 약 10, 2차 전도여행으로부터는 약 5년 정도 지난 시점입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바울의 문안에는 구제헌금 전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3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기록한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그 후 마게도냐로 와서 빌립보에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들입니다. 나중에 고린도로 내려와 거기서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로마서를 쓰고 얼마 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오늘 본문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구제헌금이 잘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면서 남부 아가야와 북부 마게도냐 여러 교회들이 모은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갈 텐데 잘 받아들여지도록, 그리고 일을 마치고 로마의 여러분을 방문하여 좋은 교제를 나누도록 기도해달라’(15:31-32)는 내용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는 자세히 안 나와 있지만, 바로 그 구제헌금을 이때 전달한 겁니다. 큰 흉년을 당한 예루살렘 어머니교회 크리스천들을 위해서 마게도냐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제헌금을 모았고, 바울은 자기 일행과 함께 그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야고보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이때 이 지도자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그리고 바울도,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관계가 별로 없었는데,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 됨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전달뿐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낱낱이말합니다. 10년 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공의회에서 만났을 때는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다음이었습니다. 154절을 보면, 당시 바울은 야고보를 포함한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도여행을 통해 어떤 역사를 하셨는지 간증했습니다. 그때는 구브로에서 시작하여 갈라디아를 돌고 왔습니다.

 

그 후 바울은 10년 정도 사이에 두 차례(2차와 3) 전도여행을 더 했으니까,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간증한 내용은, 이미 했던 1차의 내용이 아니라 2차 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이루셨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갔다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2차 전도여행 때는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본 환상, 마게도냐에서의 역사,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남쪽의 아덴(아테네)까지 간 일,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 특히 갈리오 판결 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후 3차 전도여행 때는 갈라디아로 갔다가 에베소를 거쳐 그리스로 간 것, 돌아올 때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치려 하니까 고린도에서 다시 북쪽으로 걸어갔던 일, 드로아에서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살린 일,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여러 아름다운 일 등의 간증을 했다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방문한 도시는 21개였고, 그가 걷거나 배를 타고 누빈 거리는 총 3천 마일이 넘었습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24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약 3,800마일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10년 동안에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45개 도시를 방문하고 6,800마일을 걷거나 배를 타고 다닌 것입니다. 굉장한 거리를 걷거나 배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역사를 이루신 것, 특히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역사였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전도 여행 중에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간증했고,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 함께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20).

 

 

3.   야고보의 제안을 수용하는 바울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0)

 

마침내 바울의 간증이 끝났는데, 보통 이렇게 성공적으로 온갖 역경을 뚫고 복음을 전하여 전도 사역을 완수하고 돌아온 바울에게 보통 우리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훌륭하다. 너무 잘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해주셨구나! 감사하다. 바울 당신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칭찬과 덕담을 건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와 예루살렘 장로들이 그렇게 했다는 말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약속을 한 것처럼 한마디 칭찬도 없이 그냥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정확한 말입니다. 바울 개인이 뛰어나서 잘된 게 아닙니다. 그가 뛰어난 사람이고 열정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해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나서 그래도 한마디 정도는 바울, 수고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데 엉뚱하게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들 중 믿는 자 수만 명이 있는데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바로 넘어갑니다.

 

이것을 보면서 야고보가 바울을 좀 싫어했던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이방인 교회를 세우고 다녔기 때문에, 본토 히브리파 유대인 크리스천들 중에는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전에 복음의 원수로 살던 사람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나? 왜 저렇게 들쑤시고 다니나?’ 하며 좋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아직도 유대인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해서 유대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야고보와 장로들, 특히 야고보가 바울을 환대하고 칭찬하기보다는 이 문제가 있으니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오해받고 있으니 그것을 해결하라.’ 하고 돌렸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16세기의 유명한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입니다. 루터가 야고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르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잘못 본 겁니다.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서신이 야고보서입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1)

 

지금 예루살렘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수만 명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유대인인데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그렇고 야고보와 사도들도 그렇고, 모두 유대인 크리스천입니다. 특히 이들은 히브리파 본토 유대인들입니다.

 

2016절에 보면, 바울이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유대인들의 명절인 오순절 직전이었고, 명절을 맞아 이곳저곳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수많은 유대인들 중에 크리스천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이 확정되기 전입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 복음의 관계가 완전하게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과도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따른 유대 전통을 여전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금 심하게 나가는 사람들은 유대주의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아직도 주장했습니다. 분명히 AD 50(사도행전 15)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분명히 그게 아니라고 확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도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자기 민족을 위해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자기 민족을 위하고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거부를 당했기 때문에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유대인이 되고서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입니다.

 

나중에 25절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도행전 15장에서 있었던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금하는 것 이외에는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율법의 굴레도 씌워서는 안 된다고 이미 결정이 났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의 의무를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혼자 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여기 21절에서 바울이 이방, 즉 아시아와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하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소문이 전해졌다는 겁니다. 이게 요즘 우리말로 하면 뭡니까? 바로 가짜뉴스입니다. 가짜뉴스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있고, 동서고금을 막록하고 항상 있습니다.

 

바울의 일행 중에 누가 있습니까? 디모데가 있습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인입니다. 아버지 쪽으로 따지면 굳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발탁하여 떠날 때 할례를 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치니까 그랬습니다. 굳이 받을 필요는 없지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은 디모데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거기서 즉시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거, 가짜뉴스입니다. 제가 장본인인데 이게 말이 됩니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댓글을 단다든지 반론을 펼칠 수 있지만, 그때는 어디서 누구에게 반론을 펼치겠습니까? 그래서 오해를 받고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 된 겁니다. 그래서 단순한 유대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까지도 오해를 받고 화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2)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도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짓밟는다는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유대인 크리스천들과는 달리, 그 소문을 믿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로 우리는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믿음과, 또 거기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들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즘도 정말 분별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정치적으로 누구를 편드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못된 것은 잘 분별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가짜뉴스가 지금도 판을 치는가에 대해서는 이전에 제가 쓴 목회편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자기가 듣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쪽으로 뉴스가 나오니까 그것을 진짜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확증편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지 말고, 이것이 진짜인가를 잘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진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거짓에 넘어가서 되겠습니까? 무엇이 진실인지를 잘 분별하는 지혜가 정말로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3-25)

 

마침 예루살렘 교회에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이 네 명 있었는데, 그들의 서원이 막 끝나는 시기였습니다. 구약 민수기 6(13~15)에 의하면, 나실인 서원 기간이 만료된 사람은 성전에 7일 동안 머물면서 정결예식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8일에는 머리를 깎아야 했습니다.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제물도 바쳐야 했기에, 그 모든 관습을 다 이행하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은 바울에게, 그 서원한 네 명과 함께 성전에 머물면서 그들이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는 비용을 치러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안 믿는 유대인들은 오해할지 몰라도,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바울이 모세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오해를 끝낼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26)

 

결국 바울은 그 네 명과 함께 성전에 머물면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이 조언해준 것처럼 그들이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는 데 드는 경비를 치러줍니다. 그렇게 도와줌으로써 자기는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버린 게 아니라는 것, 유대인으로서 자기도 다 지킨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최고 지도자였던 야고보와 복음을 그렇게 많이 전한 사도 바울이, 수만 명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바울이 잘못했다라고 하는 여론이 무서워서 신앙 양심을 버리고 마치 내게도 율법이 최고입니다.’라는 식으로 율법 중심주의의 핵심에 있는 사람처럼 혹시 타협한 게 아니냐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온 바울이, 조금 위험해지는 것 같으니까 살짝 타협해서 율법도 좋다고 한 거냐?’라고 질문합니다. 사실 목숨을 걸고 온 바울이 목숨을 잃는 게 두려워서 타협을 한 것이겠습니까?

 

만약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할례를 행해야 한다.’라고 했다면 바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바울이 이렇게 했는가 하는 것은, 3차 전도여행 중 예루살렘 오기 전에 쓴 고린도전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전 9:19-23, 새번역)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 같이 하고, 율법 없는 이방인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방식에 맞춰주며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거 보라. 바울도 이렇게 했다. 그러니까 술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로 접근을 하고,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는 담배로 접근을 하고, 마약 하는 사람에게는 같이 마약 하면서 접근을 해서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 믿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예수 믿던 사람마저 잘못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방법입니다.

 

바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정말로 그런 분들을 구원하려면, 같이 술 마시면 안 되고, 같이 담배 피우면 안 되고, 같이 마약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다른 모습, 그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바울은 사랑으로 접근한 것이지, 무슨 방식으로 접근한 게 아닙니다. 결국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산 것은 복음 안에서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목적을 위해, 복음을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 시대에 교회들이 많고, 저희도 벌써 28년이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힘은 교회 건물의 크기나 헌금 액수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룩함에서 나옵니다. 몇 명이 모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인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사느냐가 교회의 건강을 보여줍니다.

 

이 땅 어디를 가든지 큰 예배당들이 많습니다. 지금 안타까운 것은, 유럽에 가보면 그 큰 교회 건물들이 다 관광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지금도 예배가 드려지기도 하지만, 관광이 주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큰 대형교회들도 교인 수를 자랑하고 예산을 자랑하지만,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소식은 별로 들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이는 모였는데 세상에 나가서 믿는지 안 믿는지 똑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구분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면서,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이 로마제국과 전 세계를 바꿔놓은 것은,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돈이 많고 권력이 많고 힘이 많아서 그랬던 게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야고보도,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도, 바울과 함께 한 모든 이방인 동역자들도, 전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세상이 변화되고 그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럼으로써, 비록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의 복음 전도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9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행 25:1-12)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1 (12/01/2019) kpccoh 2019.12.01 1700
238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한 사람" (눅 17:11-19) - 추수감사절 메시지 (11/24/2019) kpccoh 2019.11.24 4601
237 "회복과 교회" (행 1:8, 21-26) - 조문길 목사 (11/17/2019) kpccoh 2019.11.17 992
236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행 24:22-2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80 (11/10/2019) kpccoh 2019.11.10 4791
235 "부활의 소망에 대한 변호" (행 24:10-2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9 (11/03/2019) kpccoh 2019.11.03 1918
234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짓 고소" (행 24:1-9)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8 (10/27/2019) kpccoh 2019.10.27 2487
233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행 23:25-35)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7 (10/20/2019) kpccoh 2019.10.20 1920
232 "바울에 대한 암살 음모가 발각되다" (행 23:12-2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6 (10/13/2019) kpccoh 2019.10.13 1441
231 "공회 앞에 선 바울" (행 23:1-1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5 (10/06/2019) kpccoh 2019.10.06 3620
230 "이는 로마 시민이라" (행 22:22-3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4 (09/29/2019) kpccoh 2019.09.29 2596
229 가정교회 간증집회 - 곽인순 목자 (09/22/2019) kpccoh 2019.09.22 458
228 "바울의 회심 및 사명 간증" (행 22:1-21)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3 (09/15/2019) kpccoh 2019.09.15 3587
227 "예언대로 일어난 결박과 환난" (행 21:27-40)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2 (09/08/2019) kpccoh 2019.09.08 2116
»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다" (행 21:15-2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1 (09/01/2019) kpccoh 2019.09.01 3092
225 "예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행 21:7-14)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0 (08/25/2019) kpccoh 2019.08.25 1848
224 "두로에서의 귀한 만남" (행 21:1-6)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9 (8/18/19) kpccoh 2019.08.18 1771
223 "영적 지도자들을 위한 경고" (행 20:28-38)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8 (8/11/19) kpccoh 2019.08.11 2756
222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 (겔 36장: 37-38절) - 스토리텔링 말씀 집회 4 - 김연수 목사 kpccoh 2019.08.04 1195
221 "무명의 헌신" (출 2장: 1~10절) - 스토리텔링 말씀 집회 3 - 김연수 목사 kpccoh 2019.08.04 887
220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행 20:17-27)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7 (7/28/2019) kpccoh 2019.07.28 4222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